이번에 제가 <한빛국가유산TV> 기획 영상으로 상주 목사 신잠 선생께서 세웠다는 18개 서당을 하나하나 찾아가 보기로 하였답니다.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공부를 해가며 찾아가서 답사를 하고 촬영을 하여 유튜브 영상으로 담아 소개를 했습니다.
영상과 함께 티스토리에 우리가 찾아낸 서당 한 곳 한 곳을 글로 담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서당 11곳과 터만 남은 서당 3곳, 그리고 정확하게 어디인지 어떤 자료도 없고 정보도 없어 알 수 없는 곳이 4곳이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은 아래 링크로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IoCr0lCvpmQZWg42KjmsrGjSC4MTRdRu&si=rSWR03_xF-OlDFoz
상주 목사 신잠 선생께서 세운 서당 여덟 번째 이야기는 상주시 지천1길 49에 있는 지천서당(智川書堂)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천서당이 아니라 연악서원(淵嶽書院)으로 승격된 곳이랍니다.
지천서당에서 연악서원으로
이 마을 이름은 지천동인데요. 옛 이름은 '질구내' 라고 합니다. 이 마을 뒤쪽에는 상주의 이름난 산인 갑장산이 있고요. 마을 앞으로 '질구내'라는 하천이 흘러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렀나 봅니다.
신잠 목사께서 세운 지천서당을 찾았는데 서당은 오래 앞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에 서원으로 바뀐 곳이더라고요.
사실 여기 연악서원은 여러 해 앞서 이 마을에 맛집이 있어 왔다가 마을이 하도 예뻐 한바퀴 돌면서 구경을 하다가 처음 알게 된 곳이랍니다. 그땐 신잠 목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할 때였지요.
홍합밥으로 이름난 밥집에서 아주 맛나게 밥을 먹고 둘러보다가 옛집이 보이길래 덮어놓고 들어가서 봤지요. 그런데 그게 서원 건물이었고 여러 해가 지난 뒤, 이 서원이 우리가 올여름날을 애쓰며 찾아다녔던 신잠 목사가 세웠다는 18개 서당 가운데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요. ^^
이번에 다시 제대로 보려고 찾아갔는데 연악서원 뜨락에 참깨를 말리고 있더군요.
애고........우리 문화유산 보러 다니다가 보면, 이런 풍경을 자주 만난답니다. 농작물을 말리는 모습인데 마을에 사는 분이거나 아니면 이 서원을 관리하는 분이거나 둘 중에 하나이겠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풍경이 썩 좋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이 정도쯤이야 봐줄 만은 합니다. 얼마 앞서도 소개했지만 진천 식파정에 갔을 때 정자를 통째로 차지하고 남자들이 벌러덩 누워있고 정자 한쪽에서는 가스레인지 켜고 음식 해 먹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요. 이런 풍경은 진짜 꼴불견이거든요.
이번 기회에 또 한 번 더 얘기합니다.
"제발 우리 문화유산에서 이런 짓은 좀 하지맙시다!"
연악서원(淵嶽書院) 편액입니다.
'연악(淵嶽)‘은 깊은 못과 큰 산(山)’이라는 뜻으로, 침착(沈着)하고 흔들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네요.
연악서원은 1553년(명종 8) 상주목사 신잠(申潛)[1491~1554] 선생이 세운 18개 서당 가운데 하나인 지천서당(智川書堂)이 그 뿌리가 되는 곳입니다.
1658년(효종 9)에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서당의 강당을 복원하였고요. 1702년(숙종 28)에 박언성(朴彦誠), 김언건(金彦健) 1511~1571], 강응철(康應哲)[1562~1635] 이렇게 세 분을 지천서당에 배향하면서 서원으로 승원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연악서원을 두 주에 걸쳐 두 번이나 다녀왔답니다. 위 사진은 두 번째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 지난주와 달리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더라고요. 마당에 잡풀도 싹 다 베었고요. 뜨락에 말리던 깻단들도 없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굉장히 반갑고 고맙더라고요.
누군가 우리가 다녀간 걸 안 것일까?
누구라도 찾아오는 이가 있음을 알고 이렇게 깨끗하게 청소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무튼 참 고마운 일입니다.
연악서원 강당 건물인 이곳은 앞면 4칸, 옆면 2칸인 팔작지붕인데요.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양쪽이 온돌방으로 된 구조라고 하는데 이 강당은 아쉽게도 바깥쪽에 문을 달아서 안쪽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답니다. 그렇겠거니 짐작만 했답니다.
양쪽이 온돌방이구나 하는 건 알겠는데 양쪽 옆면에 있는 굴뚝을 보니 확실하네요.
이렇게 강당의 앞쪽에 툇마루를 놓았는데 마루 안쪽은 문이 닫혀있어 들여다볼 수 없었습니다.
강당 뒤쪽 모습인데요.
뒤쪽에 아궁이가 두 개 보입니다.
뒤에서 불을 때고 옆에 있는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겠네요.
조선 영조 때에도 서원철폐령이 있었다는 것 아시나요?
우리가 흔히 '서원철폐령' 하면,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내린 걸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영조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조 때 서원 철폐령
임금이 허락하고, 마침내 하교하기를,“무릇 법령이 해이해지는 것은 오로지 흔들고 어지럽히는 데 연유한다. 갑오년(1714년)에 정식(定式)한 뒤에 조정에 아뢰지 않고 사사로이 건립한 사원(祠院)과 사사로이 추향 하는 경우 대신이나 유현을 논하지 말고 모두 철거하도록 하고, 이미 죽은 도신은 논하지 말되, 나머지는 모두 파직할 것이며, 수령은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그리고 수창(首唱)한 유생은 모두 5년을 기한 하여 정거(停擧)하게 하라.
이후로 사사로이 건립하거나 추가로 제향 하는 경우 도신과 수령은 모두 고신(告身)을 빼앗는 율(律)을 시행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영조 53권, 17년(1741 신유 / 청 건륭(乾隆) 6년) 4월 8일(임인) 5번째 기사
위의 영조실록에서 밝힌 대로 법령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갑오년(1714년) 이후 사사로이 세운 사원(사당)과 사사로이 추향 하는 경우에는 모두 철거하고 또 처벌하겠다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아마도 이때에도 무분별하게 세워지는 서원과 조정에 알리지도 않고 사당을 세우고 인물을 배향하는 곳이 많았나 봅니다.
이렇게 해서 서원을 웬만큼 정리를 했다고 하는군요.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예조(禮曹)에서, ‘한 사람에 대해 중첩하여 세운 서원(書院)을 헐어버리는 문제는 두 차례의 하교에 따라 신 조병창(趙秉昌)이 대원군(大院君) 앞에 나아가 품의(稟議)한 결과, 「성묘(聖廟)의 동쪽과 서쪽에 배향하는 제현(諸賢)과 충절(忠節)과 대의(大義)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으로서 실로 백세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개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사를 그만두며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미 사액(賜額)하여 계속 남겨두어야 할 47개의 서원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계하(啓下)한 뒤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3월 20일(경술) 4번째 기사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처벌 규정은 따로 없지만 47개 서원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철폐하라는 매우 강경한 명이었지요.
아,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요?
1725년(영조 1)에 조정의 금령에 따라 서원훼철령이 이 연악서원에도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영에서 잘못 조사하여 내린 거라고 영조의 행차를 기다렸다가 훼철령이 잘못 집행되었다는 걸 알렸다고 합니다.
영조의 행차를 기다렸다고 하는데 영조 임금이 상주 땅에 다녀간 적이 있었나 봅니다.
이에 1726년에 다시 철회되었고 자칫하면 서원이 없어질 위기에 놓였으나 구사일생한 셈이 되었지요.
이때에 김각(金覺)[1536~1610], 조광벽(趙光璧) [1566~1642], 강용량(康用良)[1608~1676] 세 분을 추가로 배향했다고 합니다.
저 산 중턱에 연악서원의 사당이 있다
하지만 1870년(고종 7)에 서원이 훼철되었고 그 뒤로는 오랫동안 복원되지 못하였지요.
1900년(광무 4)에 서원 자리에다가 단소를 세워 향사만 지내왔다고 합니다.
그 뒤로 1974년에 지역 유림들의 뜻을 모아 강당을 새로 중건했는데 그게 바로 아까 우리가 위에서 보았던 연악서원 강당 건물이랍니다.
강당 안에는 <지천서당> 편액도 함께 걸려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문이 모두 닫혀 있어 대청 안을 볼 수가 없었네요.
그 뒤, 1987년에 묘우(사당)를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본 연악서원에는 사당 건물이 없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서원 앞 질구내 하천 건너 산 중턱에 잡풀에 가리워진 옛집이 바로 그 사당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연악서원도 바로 그다음 주에 다시 찾아온 것이었고요. 저기 사당에 올라가 보려고요.
사당인 창덕사(彰德祠)는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인데 1987년 서원을 복원하며 지은 건물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질구내 하천을 건너서 저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물은 그리 많지 않아 건널 수는 있겠는데 아무리 봐도 길도 보이지 않고 이 여름날(2024년 8월 18일), 발밑에 있을 뱀이 겁이 나서 잡풀을 헤치며 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망원으로 당겨서 본 연악서원 사당인 창덕사입니다.
더 당겨보니까 앞에 삼문이 있고 뒤쪽으로 사당 건물이 보입니다. 또 사당 건물을 빙 둘러 흙돌담을 쌓은 것도 보이네요.
아쉽지만 이보다 더 자세하게 볼 수는 없었답니다.
연악서원 사당인 창덕사는 올 겨울에 다시 와서 보자! 하고 다음을 기약했답니다.
현재 연악서원에는 「연악서원 상량문」, 「연악구곡기」, 「연악문회록」, 「복향고유문」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으로 지천서당이 불탄 이후 강당을 새로 중창하면서 연악서원에 관한 내력을 기록하여 놓은 상량문으로 강용량(康用良)이 지었다. 「연악구곡기」는 강응철이 지천서당 앞의 계류를 따라 명명한 것이다. 「연악문회록」은 1622년(광해 14) 연악서원에서 시회를 개최할 때 참석한 15인의 시집이다. 「복향고유문」은 서원이 훼철되고, 다시 복향하는 고유할 때의 고유문이다. 연악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중해(中亥)일에 향사를 지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금 우리가 본 연악서원 강당 건물은 2005년에 새로 고쳐지은 것이라고 하고요.
강응철 선생이 썼다는 <연악구곡기>가 있다고 하는데 몇 해 앞서 처음 연악서원을 알고 이 질구내 하천에 내려와서 찍었던 사진이 기억나서 찾아봤답니다.
바로 이 사진인데요.
제2곡 사군대(使君臺)를 알리는 표지판이었어요. 이때는 연악구곡기를 전혀 알지 못한 때라서 아, '여기도 예부터 산수가 빼어나 이렇게 구곡으로 정했나보다' 쯤으로만 여겼어요.
이번에 알고 보니, 연악구곡 가운데 하나인 곳이었군요.
그러나 이번에 갔을 때는 이 표지판을 보지 못했답니다. 제가 놓친 것인지 아니면 지난해 수해 때 사라진 것인지...
또 <연악문회록>은 연악서원에서 시회를 열었는데 그때 참석한 열다섯 분의 시집이라고 하네요.
이런 걸 볼 때 지천서당에서 연악서원으로 승격이 된 내력과 함께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지역의 유림들과 문인들이 글을 짓던 창작활동을 많이 펼친 곳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네요.
매우 뜻깊고 오랫동안 잘 보존해야 할 값어치가 너끈한 곳이네요.
연악서원 사당인 창덕사는 잡풀 없고 뱀 걱정 없는 올겨울에 다시 도전해 보렵니다. 그때 다녀오면 다시 소개할게요. ^^
오늘은 상주 목사 신잠 선생이 세운 18개 서당 가운데 서원으로 승격이 된 두 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연악서원으로 바뀐 지천서당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이다음에는 상주 도림사 절집 아래에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 <도곡서당> 이야기로 만날게요.
★ 제가 꾸리는 한빛국가유산TV에 소개한 영상도 함께 보세요.
https://youtu.be/u5kP2wi-wdc?si=dvAeLOSoK48NtF1A
상주시 지천 1길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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