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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이 들려주는 국가유산 이야기

상주 죽림서당- [상주 목사 신잠 선생이 세운 서당 4] 옛 건물에 니스칠을 하면 안돼~!

by 한빛(hanbit)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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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죽림서당

 

이번에 제가 <한빛국가유산TV> 기획 영상으로 상주 목사 신잠 선생께서 세웠다는 18개 서당을 하나하나 찾아가 보기로 하였답니다.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공부를 해가며 찾아가서 답사를 하고 촬영을 하여 유튜브 영상으로 담아 소개를 했습니다.
영상과 함께 티스토리에 우리가 찾아낸 서당 한 곳 한 곳을 글로 담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서당 11곳과 터만 남은 서당 3곳, 그리고 정확하게 어디인지 어떤 자료도 없고 정보도 없어 알 수 없는 곳이 4곳이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은 아래 링크로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IoCr0lCvpmQZWg42KjmsrGjSC4MTRdRu

 

상주 목사 신잠이 세운 서당 18곳

상주 목사로 부임해온 영천자 신잠(1491 ~ 1554) 선생이 상주 땅에 세웠다는 18개 서당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곳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아있는 곳이 대략 10곳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시

www.youtube.com

 

 

상주 목사 신잠 선생께서 세운 서당 네 번째 이야기는 상주시 은척면 무릉2길 42-6에 있는 죽림서당(竹林書堂)이랍니다.

좁은 길을 따라 마을 안쪽에 들어왔는데 어쩐지 남의 집 마당으로 들어갑니다.

앞쪽에 서당 건물은 보이는데 그 앞에 옥수수로 울타리를 쳐 놓았네요. 사실 여기 오기에 앞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봤는데 건물 바로 앞까지 밭이 있어 들어갈 수 있을까? 몹시 걱정을 하면서 왔답니다.

다행히 들어갈 수는 있겠습니다. 

서당 둘레에 이런저런 농기구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어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딱 봐도 서당 건물이 매우 깨끗하게 보입니다.

아하~! 예전에는 대문 앞까지 밭이었는데 이렇게 옥수수로 울타리를 친 곳을 멀찌감치 비켜서 심었네요.

대문 앞도 꽤 널찍하게 틈을 두었습니다. 

 

서당 대문 앞에 주소도 잘 붙어있고요.

대문에 빗장은 잠겼지만 열고 들어갈 수는 있어 무척 고마웠답니다.

마치 밥집에서 밥 시켜놓고 나오기 바로 앞서 설레는 마음이랄까요? 그런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우와~! 서당이 진짜 깔끔하다!

 

아, 들어가기에 앞서 서당 건물 전체를 찍을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 담장 너머로 먼저 한 컷 찍고 갑니다.

상주 죽림서당

오른쪽 담장 너머로도 찍고요.

 

안쪽에 들어오니 이런 모습이네요.

마당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시멘트로 아주 깔끔하게 마감을 했습니다.

오랜 전통이 있는 옛 서당과 시멘트가 잘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어쩌겠어요? 아무래도 관리하기에는 이게 훨씬 편하니까요.

 

죽림서당은 앞면이 3칸, 옆면이 2칸짜리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는 대청인데 오른쪽 방은 앞쪽으로 대청이 이어지도록 했네요.

 

죽림서당 편액은 아주 소박합니다.

 

왼쪽에는 방이 두 칸이 보이고요. 오른쪽에는 한 칸입니다. 

오른쪽에는 한 칸만 두어 답답하지 않고 트인 느낌이라서 좋네요.

그런데 왼쪽 방 두 칸은 실제로 방이 두 칸인 것인지 문만 그렇게 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아주 남다른게 눈에 띕니다.

가운데 대청 뒤쪽에 문이 나 있는데 아래쪽은 흔히 보는 것이지만 위쪽 문은 가로로 누워있네요? 퍽 재밌는 모양입니다.

 

장석을 달고 들어열개문으로 만들었는데 아무튼 가로로 누워있으니 진짜 남다르네요.

 

천정 서까래들이 굉장히 촘촘하게 박혔네요.

아궁이도 보이고요.

 

마루에 먼지는 쌓였지만 꽤 깔끔하고 깨끗한 건물입니다.

죽림서당의 옆면과 뒤쪽 모습입니다.

 

뒤쪽을 보니 방문이랑 장석이 있는 부분들은 새로 고친 게 보입니다. 자재들이 서로 다르지요?

 

네 개 문중에서 꾸리는 죽림서당

 

한참 동안 서당 곳곳을 구경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립니다. 

서당 뒷집에 사는 분이신데 이곳 죽림서당을 관리하시는 분이라고 하시네요.

알고 보니, 이 죽림서당은 남양홍씨, 진주 류씨, 영양 남씨, 의령 남씨 이렇게 네 개 문중에서 함께 관리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분은 진주 류씨 후손(64세)이라고 하시네요. 제가 성함은 여쭤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손봐야 할 곳들은 고치곤 한다더군요. 서당 건물이 이렇게 깔끔한 데에는 다 까닭이 있었네요. 참 좋습니다.

 

 

앗~! 그런데 기둥이 시멘트 바닥에 그냥?

 

사실 이 어른께서 말씀해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갈 뻔했습니다. 몇 해 앞서 다시 한차례 보수를 했는데 수리를 잘못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원래는 기둥을 세울때 아래에다가 주춧돌을 놓고 세워야 하는데 그냥 시멘트 바닥에다가 기둥을 세웠다고요.

이렇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 건물이 기울어질 수 있다고요. 실제로 지금도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상태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한옥에는 니스칠을 하면 안 되는데 니스칠로 마감을 해놨다면서 안타까워하셨어요.

니스칠을 하면 겉으로는 말짱해 보이지만 나무가 숨을 쉬지 못해 속으로 썩는다고요.

저런........... 말씀을 듣고 보니 겉으로는 진짜 깔끔해 보였지만 건물에는 굉장히 안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또 지난해인가? 어떤 이들이 지붕 위에 난 와송을 따겠다고 올라가서 이렇게 새로 고쳤다고 하더라고요.

뒤쪽에 가서 보니 여기도 고친 흔적이 보이더라고요.

 

에효~ 저런! 와송을 따겠다고 우리 문화유산 지붕 위에 올라가다니요?

진짜 그러지 마세요~!

 

죽림서당 변천사

 

상주 목사 신잠 선생께서 죽림서당을 처음 세울 때는 지금 이 자리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은척면 죽림마을(현, 봉상 2리)에 세워져 고을 내의 여러 문중이 협력하여, 지방에 있는 인재를 가르치고 길러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없어지게 되자 그 이후 1695년(숙종21)에 다시 그 자리에 중창(重創)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홍도달(洪道達, 1664~) 선생이 지은 죽림서당기(竹林書堂記)가 있었으나 마을 어르신들의 말로는 6.25 이후에 없어졌다고 하네요.

 

상주시청 누리집 마을 유래 소개글에서

 

이번에 죽림서당 영상작업과 글을 쓰면서 여러 자료들을 살펴봤는데 상주시청 누리집에 올려진 글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홍귀달(洪貴達) 선생이 쓴 죽림서당기가 있다는 대목에서요.

홍귀달 선생은 제가 여러 달 앞서 연산군의 폭정에도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던 허백당(허백정) 홍귀달 선생 신도비와 종택 묘소까지 소개했던 그분이잖아요?

아니, 그럼 우리가 또 이 귀한 걸 놓쳤는가? 하면서 말이에요.

 

죽림서당기가 적힌 현판이 있는지 사진과 영상을 다 뒤졌지만 그건 없더라고요. 앞서 말한 대로 한국전쟁 때에 없어졌다고 하니 남아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홍귀달 선생이 쓴 게 아니라, 홍도달 선생이 쓴 기(記)가 맞는 거랍니다. 

홍도달은 일명 홍달도(洪達道)로도 불리며, 자(字)는 제겸(濟兼)이고, 호(號)는 과헌(果軒)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인 분이더군요.

 

상산지에는 「竹林 在州西四十里 銀城竹林村 壬辰亂盡燒 肅廟乙亥重創洪道達有記 已上十七書堂申靈川潛爲牧使時所建(죽림 재주서사십리 은성죽림촌 임진란진소 숙묘을해중창 홍도달유기 이상십칠서당 신영천잠위 목사 시소건)」이라 적고 있으며,
함창현지에도 「竹林書堂 在郡西四十里銀尺面竹林村壬亂盡燒 肅宗乙亥重建洪道達有記今移建于銀尺面武陵村 申靈川尙州牧使市所建(죽림서당 재군서사십리 은척면 죽림촌 임란진소 숙종을해중건 홍도달유기 금이건우 은척면 무릉촌 신 영천 상주목사 시소건)」이라 적고 있다.

 

<상산지>와 <함창현지>에 기록된 죽림서당 이야기 대목을 한자 까막눈인 제가 떠듬떠듬 찾아가며 읽어본 거랍니다.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당이 불타 없어지고난 뒤 숙종 을해년인 숙종 21년인 1695년에 다시 은척면 죽림촌(본디 서당이 있던 장소)에 중건을 하고 홍도달 선생이 중건기(重建記)를 썼다는 내용이었어요. 바로 이 죽림서당은 상주 목사 영천자 신잠 선생이 처음 세운 서당이 있던 곳이라는 것과 함께요.

 

그리고 그 뒤에도 또 남초명(南楚鳴, 1700~1768)이 중건(重建)하여 학문을 권장(勸獎)하였으나 여러 가지 환경요인으로 인하여 허물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남초명의 자(字)는 장숙(莊叔)이고, 호(號)는 죽헌(竹軒)으로 본관은 영양(英陽)이며, 문행(文行)이 탁이(卓異)하였다.

 

 

지금 현재 이 자리에 서당을 옮겨온 건 조선조 순조 말기에 남양 홍씨, 영양 남씨, 의령 남씨, 진주 류씨 등 네 문중에서 이를 계승하고, 보존하여 두곡리와 무릉리의 인재를 길러내려고 다시 복원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아까 위에서 보았던 진주 류씨 가문의 후손인 어르신께서 들은 얘기로는 이 마을에 은척초등학교(현 무릉분교장)가 생기기 앞서는 모두 이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무릉분교 1회 학생이 지금 95~96세가 된 어른이 계시고요. 관리인 어르신의 큰 형님이 5회 졸업생인데 지금 82세라고 하시더군요. 

은척초등학교 또한 오랜 역사와 전통이 깃든 배움터였네요. 어쨌거나 초등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 사람 모두 이 죽림서당에서 배우고 익혔다고 하니 참 놀랍습니다.

 

지금까지도 옛 선현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죽림서당이 잘 관리되고 보수도 하고 있다니 참 고마운 일이지요?

죽림서당유계가 있어 매년 음력 11월에 모임을 갖는데 서당에 딸린 전답이 있어서 임대를 주어 농사를 짓고 그 소출로 행사도 하고 보수도 한다고 하네요.

 

참 지금 현재는 남양 홍씨, 진주 류씨, 그리고 남씨라고 했는데 영양인지 의령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세 문중에서 꾸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다음에 들려드릴 다섯 번째 이야기는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에 있는 <송암서당> 이야기입니다.

 

★ 제가 꾸리는 한빛국가유산TV에서 소개한 영상도 함께 보세요.

 

https://youtu.be/Vt-Wx9Nh3aw?si=B7A_17Hi9H1HmbFq

 

 

상주시 은척면 무릉2길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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