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 쌍림면에 들어서서 합천 쪽으로 가려던 길에 마을 앞을 지키듯 소나무가 일렬로 서 있는 곁에 웬 정려각이 하나 보여서 차를 되돌려 가봤습니다.
들어와서 보니, 마을 이름이 '하거리'네요.
이 앞을 꽤 여러 번 지나다녔는데도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답니다.
정려각은 꽤 아슬아슬합니다. 그렇지만 담장으로 두르고 터도 꽤 넓은 데다가 마을 들머리에 세워놓은 걸 보니 꽤 뜻깊은 것으로 보이네요.
정려각 옆으로는 등산로가 따로 있더군요.
아름드리 팽나무도 그렇고 마치 누룩바위처럼 생긴 바위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을 앞에는 안림천이 흐르고 넓은 들판이 한눈에 보이는 굉장히 평화롭고 풍요로워 보이더군요.
하거리 마을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많아서 해마다 학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마을 이름도 학골, 학동, 하긋골이라고 일컬어 왔다고 합니다.
학동 마을을 휘둘러 감은 산맥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등산 코스가 있나 봅니다. 예부터 좌청룡 우백호 지형으로 마치 만든 것 같아 더욱 특별하게 여겼다고 하네요.
옛 고을 원님이 인력거를 타고 지나시다가 수레에서 내려 답사하였다 하여 아래 하(下), 수레 거(車)로 행정이름을 바꿨다고 하네요.
뒤쪽에 있는 소나무도 멋있지만 바로 앞에 있는 이 나무 역시 굉장히 멋스럽고 나이가 많이 들어 보입니다.
나중에 마을 주민한테 여쭈었더니 팽나무라고 하네요. 어릴 적에 이 나무를 많이 타고 놀았다고 하시며...
팽나무 아래에는 그리 크지 않으며 납작한 바위가 있는데 성혈(性穴)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냥 널브러져 있는 듯한 곳에 이런 바위를 보니 신기합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그 옆에는 고누놀이판이 새겨진 바위도 있네요.
그 옛날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틀림없이 여기서 고누놀이를 했던 추억이 있겠지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들이라 마냥 신기합니다.
우리가 궁금한 건 바로 이 정려각입니다. 앞에 따로 안내판도 없어서 어떤 분의 것이고 또 어떤 종류인지 알 수가 없었답니다.
정려각 앞에 있는 돌비를 떠듬떠듬 읽어봤어요.
'통덕랑 배공.... 성산이씨부인 정려문'이라고 되어 있네요.
아마도 배씨 성을 가진 이의 부인인 성산 이씨 부인한테 내려진 정려인가 봅니다.
따로 안내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확하게 어떤 의미가 담긴 정려인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는데 때마침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우리를 보고 다가서며 인사를 건네십니다.
지나가다가 이 정려각을 보고 궁금해서 왔다고 했더니 정말 고맙게도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더라고요.
게다가 정려각 안쪽을 구경하라고 손수 문도 열어주셨어요.
孝烈婦通德郞星州裵㞳配孺人星山李氏之閭(효열부통덕랑성주배두배유인성산이씨지려)
乙卯 五月 上旬 日 改刊(을묘 오월 상순 일 개간)
그러니까 성주 배씨인 통덕랑 '배 두'란 분의 부인인 성산 이씨 부인의 효열을 기리는 정려였던 거예요.
중수 상량문(重修上梁文)
중수기(重修記)
通德郞星州裵公諱 㞳 (통덕랑성주배공휘 두)
配孝烈婦星山李氏旌閭碑( 배효열부성산이씨정려비)
따로 바닥에는 정려빗돌도 세웠습니다.
정려각 앞에는 효열각(孝烈閣) 편액을 걸어두었네요.
아하, 그러고 보니 아까 정려각 앞에서 본 돌로 만든 빗돌에 적힌 글이 정확하게 이거였군요.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아 잘 몰랐는데 정려각 안쪽을 보고 나니 알겠군요.
通德郞裵公諱㞳配星山李氏夫人旌閭文(통덕랑 배공 휘 두 배 성산 이씨 부인 정려문)
성산 이씨 부인의 효행을 적어놓은 정려문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 글씨도 희미해져 알아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마을 어르신께서 이 정려에 얽힌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게 들려주셨습니다.
"성산 이씨 부인인 우리 할매(조상 할머니를 일컫는 말)의 정려각인데"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옛날에 집과 사당에 불이 났는데 불길을 뚫고 사당에 들어가서 시부모님과 남편의 신주를 품에 안고 나왔다고 합니다. 신주는 할머니 품에 있어 무사했지만 그만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불에 타 숨지고 말았답니다. 할머니의 나이가 이때에 일흔이었다고 하네요.
"불이 났는데 혼백(신주) 카는 거 안 있심니꺼? 그걸 들고 나오다가 그만 불에 세상을 베리뻐린기라"
이런 할머니의 효성심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임금께 고하여 나라에서 효열 정려를 내렸는데,
'칠십 노령에 불더미 속에서 몸을 던져 시부모님과 부군의 혼령을 구하였으니 멀고 가까운 친척과 이웃 사람들이 혀 차는 소리가 갸륵하고, 장한 李氏(이씨) 부인의 명성을 천추 만대에 길이 빛내기 위하여 효열 정려를 건립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이지요?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위급하고 목숨이 끊어질 두려움에도 마다하지 않고 불길에 뛰어들어 신주를 품에 안고 나오던 그 할머니의 심정과 모습이 떠올려지더군요.
★ 마을 어르신께서 들려주시는 '성산 이씨 부인 효열비각' 이야기를 따로 한빛국가유산TV 채널에 실었습니다. ★
https://youtu.be/135E9C4a5pM?si=1My-7rjktumKW3Ff
할아버지는 성산 배씨 어르신인데 올해 연세가 82세라고 하시더군요. 이 하거리 마을은 처음에 '성산 배씨'가 마을에 터를 잡았고 그 뒤로 '양천 최씨'와 '고령 박씨'가 차례로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군요.
할머니의 남편이 '성산 배씨'였으니 그 후손이 되시겠네요.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했지요. 어르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이야기들을 어찌 알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고맙고 또 고마웠답니다.
어른과 헤어진 뒤 차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봤답니다.
마을 중간쯤에 또 다른 정려각이 있는데 여기는 '고령 박씨 열녀문'이랍니다.
마을 중간에 있는 갖가지 빗돌입니다.
나중에 집에 와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되었는데 이 마을이 예사 마을이 아니더라고요. 마을 위쪽에는 서당(학암서당)도 있고요. '양천 최씨 오현비', '송애 최호문 유허비', '학양 박경가 유허비' 등 이름 있는 분들의 유적들이 많이 있더군요. 이래저래 또다시 한번 더 찾아갈 일이 생겨서 매우 기분 좋습니다.
[성산이씨 효열비각] - 고령군 쌍림면 하거리 3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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