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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이 들려주는 국가유산 이야기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 온 집안이 독립운동가, 대우를 가벼이 하지 말기를...

by 한빛(hanbit) 2025.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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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왕산 허위 선생 생가(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

왕산 허위 선생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앞서 탄신 170주년 춘계 향사를 소개하면서 선생의 삶은 자세하게 소개를 했지요.
이 글 맨 아래에다가 앞서 쓴 글은 링크해 놓을게요.

구미시 임은동에는 향사를 지냈던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과 함께 선생의 생가 터에 세운 <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도 있습니다.

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

이 공원에는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할 때의 이야기와 함께 곳곳에 그 모습들을 조형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일본군의 총칼에 쓰러져 죽은 동료를 끌어안고 비통해하는 모습입니다.

얼굴로 봐서는 허위 선생이 불원복 태극기를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을 지닌 불원복 태극기입니다.

왕산 허위선생

왕산 허위 선생 후손들의 삶

 
왕산 선생은 조선 후기부터 명문 가문으로 이름을 알린 김해 허 씨 가문의 자손입니다. 유교 전통이 강하며 학문과 충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안이었지요.
그래서일까요?
이 집안에서 무려 열네 분이나 되는 독립운동가가 나왔다면 믿어지십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선생의 큰형인 방산 허훈은 땅 3천 마지기를 팔아 군자금으로 대고, 셋째 형 허겸과 허위 선생의 아들 허학, 종손자 허종까지도 나라를 되찾으려고 애쓴 분들입니다.

그야말로 온 집안이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온 집안이 항일운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후손들이 지난날 의병장의 집안이라며 추적하던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만주와 러시아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답니다.

만주의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그들은 굶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디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는 끝내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숨어 살고, 이름을 바꾸고, 때로는 가족조차 흩어져야 했지요.
지금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지낸답니다.

왕산 허위 선생의 후손들(2009년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개관식에서)- 사진 왕산허위선생 기념관

지난 2009년 구미시 임은동에 있는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이 처음 문을 열 때에 저도 갔었답니다.
안타깝게도 그날 찍은 사진을 찾을 수가 없네요. 컴퓨터 하드를 날리는 바람에 그 무렵에 찍은 사진을 함께 날리고 말았네요.
다행히도 예전에 기사를 쓸 때 올렸던 사진이 기사글에 남아있네요.
개관식 때 저 후손분들을 뵈었었지요.

항일운동을 하다가 낯선 나라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살다가 몇몇은 우리나라로 귀화하게 되기까지도 어려움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왕산 허위 선생께 수여한 건국공로훈장
해방 후에도 외면당한 가족들

 
조국이 해방된 날, 그들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후손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감시당하고,
어떤 이는 조용히 숨어 살며 절대 그 시절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할아버지 나라로 가려고 한국대사관을 여러 차례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중국에 살던 몇몇 은 불법으로 들어와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왕산 의병아리랑

그러나 사기와 폭행에 시달리며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불법체류자란 까닭으로 다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왕산 허위 선생과 을미의병

또 어떤 손자들은 100년 만에 국적을 받고 '한국인'이 되었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막노동을 하며 살다가 생활이 너무 힘들어 다시 그들이 난 나라로 돌아간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나라를 되찾으려고 애쓰다가 순국하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정작 할아버지의 나라에 와서도 제대로 된 대우는커녕 살기가 너무 힘들어 다시 되돌아가다니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요?

왕산 허위 선생이 일곱살에 지은 시

왕산 허위 선생의 후손들 중 많은 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난 속에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의 삶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없었을 테니까요.

왕산 허위 선생의 마지막 유서

꼭 왕산 선생의 후손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한 많은 분들의 후손들이 정말 너무나 힘겹게, 올바른 대우도 못 받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죽을 각오를 다지며 분연히 일어나는 사람들이 때때마다 참 많이 있었지요.
우리는 이런 분들의 의로운 삶과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았던 그 희생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 누각 건설현장

지난 2019년에 구미시 산동면 확장단지 물빛공원 안에다가 누각을 세워 '왕산 광장'과 '왕산루'로 이름 지었다가 이 명칭 변경 문제를 두고 지역의 한 시민단체와 구미시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광장에다가 허위 선생 집안의 독립운동가 14인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었는데 그 모든 일이 그 주민 시민단체의 갈등 때문에 취소되고 끝내 <산동루>라는 편액을 걸고 말았답니다.
 
이런 일로 왕산 선생의 손자인 허경성(당시 93세) 옹 부부가 구미시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기도 했었지요.
 
그 뒤, 구미시는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선생 광장·누각 명칭을 두고 후손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 왕산기념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했지요.,

이번에 선생의 탄신 170주년 춘계 향사 때문에 가서 보니, 바로 왕산 기념관 옆 경인재 앞에다가 누각을 세운다고 하네요. 또 이쪽 둘레에다가 공원을 만든다고 하니 기다려봐야지요. 그때 그 광장에 세우려고 만들었던 열네 분의 동상도 여기에 세운다고 하는군요.
 
오늘날 이런 행정조차도 독립운동가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눈길과 태도가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씁쓸한 일이네요.
 

잊지 맙시다! 기억하자고요.
이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의 대우를 가벼이 하지 않기를...

 
https://sunnyhanbit.tistory.com/449

항일운동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을 아시나요? 선생의 춘계 향사에 다녀왔어요

오늘(2024년 4월 2일)은 의병장 왕산 허위(1855년 4월 2일~1908년 9월 27일) 선생 탄신 170주년을 맞아 춘계 향사가 열렸답니다.제가 사는 구미시 임은동에 있는 옆에 있는 경인사(敬仁祠)에서 열렸지요.

sunnyhanbit.tistory.com

 

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 - 경북 구미시 임은동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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