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제가 <한빛국가유산TV> 기획 영상으로 상주 목사 신잠 선생께서 세웠다는 18개 서당을 하나하나 찾아가 보기로 하였답니다.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공부를 해가며 찾아가서 답사를 하고 촬영을 하여 유튜브 영상으로 담아 소개를 했습니다.
영상과 함께 티스토리에 우리가 찾아낸 서당 한 곳 한 곳을 글로 담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서당 11곳과 터만 남은 서당 3곳, 그리고 정확하게 어디인지 어떤 자료도 없고 정보도 없어 알 수 없는 곳이 4곳이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은 아래 링크로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IoCr0lCvpmQZWg42KjmsrGjSC4MTRdRu
상주 목사 신잠 선생께서 세운 서당 세 번째 이야기는 상주시 화동면 선교서당마길 131에 있는 봉암서당(鳳巖書堂)이랍니다.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 마을에 있는 봉암서당은 굉장히 너른 주차장이 있어서 차 댈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교리 마을 가장 끝, 원통산 아래에 있는 서당이라 찾기도 쉬웠답니다.
너른 주차장 만큼이나 안쪽 마당 또한 굉장히 크네요.
게다가 이 넓은 땅에 건물은 딱 한 채만 있습니다. 일각문을 앞에, 또 작은 문은 옆에 두고 나머지는 빙 둘러 담장을 쌓았습니다.
멀리서 봐도 서당 건물의 기품이 있어 보이네요. 또 처마에 걸려있는 편액이 꽤 남달라 보입니다.
봉산서당에서 봉산서원으로 그리고 봉암서당
봉암서당은 예전에 신잠 목사께서 서당을 열여덟 개 만들기 이전부터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 선생이 가르쳤던 학당이 있던 곳인데 신잠 목사께서 제대로 서당을 세우고 확대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봉산서당(鳳山書堂)이었다고 합니다. 그 서당이 있던 곳은 지금 여기 선교리가 아니라 화서면 금산리 마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봉암서당의 원 뿌리는 봉산서당이었던 겁니다.
그 뒤에 노수신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한테 1688년에 시호가 내려지고 서당에다가 묘우(廟宇)를 짓고 향사를 하게 됩니다. 봉산서당이 나중에 1708년에 봉산서원으로 승격이 되었고 같은 이름과 같은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었기에 이렇게 지금의 자리 화동면 선교리 마을로 나뉘어 서당을 옮겨왔고 이름을 봉암서당(鳳巖書堂)으로 새롭게 편액을 걸게 된 거랍니다.
봉암서당은 앞면4칸, 옆면 2칸입니다.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두었네요.
가운데 두 칸은 대청이고 양쪽으로 온돌방을 하나씩 둔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앞쪽에 다섯 개 기둥이 있는데 가운데만 원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썼습니다.
원기둥이라 좀더 탁 트인 느낌이랄까요? 답답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대청 안쪽에 명륜당 현판이 굉장히 큽니다. 앞서 보았던 모동면의 백화서당만큼이나 크게 보이네요.
그런데 대청에는 선뜻 올라서지를 못하겠더군요. 들어올 때에도 잡풀이 많아서 뱀 걱정에 발소리를 쿵쿵 울리면서 들어왔는데 여기는 이제 벌떼들이 웅웅 거리면서 다니니 도저히 겁이 나서 못 올라가겠더라고요. 애고 무서버라~~~!
대청 끝에 작은 벌집도 봤는데 이건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진짜 벌떼 소리가 엄청 무서웠답니다.
봉암서당(鳳巖書堂) 편액은 초서체로 써서 걸었습니다.
서당 이름이 걸린 편액도 명륜당 만큼은 아니지만 꽤 크고 글씨체가 남달라 더욱 돋보이네요.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으니 아궁이도 이렇게 마루 아래에 만들어 두었네요.
명륜당 현판 말고도 작은 게 3개가 걸려 있는데 왼쪽에는 봉암서당 중수기(鳳巖書堂重修記)가 있고 오른쪽에는 봉산서원유감취필(鳳山書院有感醉筆) 현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한글로 쓴 봉암서당 중수기(기해년10월) 당원 여성동 노진영이라 쓴 현판이 하나 더 있네요.
가장 마지막에 고쳐지은 때가 지난 2019년이라고 하는데 그 해가 바로 기해년이네요. 아마도 2019년 10월에 새롭게 고쳐 짓고 쓴 중수기인 듯보이네요.
봉산서원유감취필(鳳山書院有感醉筆)
「令宰臨歸德。書堂起化寧。當時鹿洞意。今日鳳山名。有傑興規制。無人請額經。回頭二十載。不死老先生。憭慄川原秀。淸幽洞壑寧。多情舊伴會。不記某丘名。松柏何時老。菱荷幾歲經。窮秋存白首。深覺負平生 降菱 戊辰秋日 穌齋 어진 수령이 귀덕(상주)에 부임하여 화령에 서당을 세웠도다. 당시에 녹동의 뜻을 따랐으나 오늘 봉산이 유명하도다. 영걸이 있어 규모와 제는 일으켰으나 청액과 경서를 청할 이 없네. 돌이켜 20년간을 생각해보니 노선생이 살아계심을 알겠네. 요율천 들녘 경치 빼어나고 청유동 골짜기 평화롭구나, 예전에 노닌 곳 감회 깊으나 언덕 이름은 알 수가 없네, 송백은 언제나 늙으려는지 능하는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늦가을 백발 성성한 이 늙은이 평생의 뜻 저버림 깊이 깨닫네. 융경 무진추 일 소재)」이라 적었다. |
마지막에 降菱 戊辰秋日 穌齋이라 쓴 글을 보고 어느 때일까 찾아봤더니, 융경은 명나라 연호인데 그때 무진년은 1598년이 되더군요. 조선 선조 원년인 가을날에 소재(穌齋) 노수신 선생이 쓴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답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묘우를 만들고 선생의 학문과 덕을 기리며 배향하면서 봉산서원으로 승격이 되었으니 아마도 선생이 쓴 글을 이렇게 편액으로 걸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건 한빛 생각입니다. 혹시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온돌방은 앞쪽에 한 개, 옆에는 문을 두 개나 달았네요. 양쪽 온돌방 모두 그렇게 만들었더군요.
봉암서당 옆면
뒤쪽에는 온돌방이 두 개이듯 굴뚝도 낮게 두 개가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대청에는 문을 두 개나 뒤로 두어서 다 열어두면 한여름 땡볕에도 무척 시원하게 날 수 있겠더군요.
대청 뒷문과 일각문이 마주 보입니다.
뒤쪽에 있는 기둥을 보니 참 재밌습니다.
여기도 자연주춧돌에 세운 기둥인데 아래 부분에는 원래 있던 나무껍질인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덧댄 것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이네요.
조선시대 서당의 수업료는?
서당은 요즘으로 보면 초등학교라고 생각하면 되는데요.
당시 수업료는 신입생한테는 1년에 벼 반 섬, 그 이상 학생들은 한 섬을 받았다고 합니다. 벼 한 섬은 10 말이니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랍니다.
대부분 학생들이 이와 같이 수업료를 냈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식사를 대접하거나 빨래를 해주기도 하고 또 땔감이나 의복으로 대체하기도 했답니다.
서당이 초기에는 마을 중심으로 세워지면서 향촌 문화에 뿌리를 두었는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문중 중심이 되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글공부 중심에서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는 향사가 늘어나면서 문중의 신분 유지를 지켜가는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향사하기에 알맞지 않은 인물까지 하게 되면서 또 다른 문제점들이 드러나기도 했다고 하네요.
또 대체로 서당이 나중에는 서원으로 승격이 되는데요. 서원이 되기까지 그 과정이 참 아이러니 합니다.
서원의 형식을 갖추려면 학문이 먼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이 서원에서 어떤 훌륭한 인물을 모시고 배향을 해야 합니다.
서당에서 서원으로
제가 이번에 여러 서당들과 또 서원을 찾아다니면서 보고 느낀 게 참 많은데 서원으로 승인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이름난 학자를 모셔야 승인이 날 확률이 커지겠지요. 그러다 보니, 그 지역과는 정말 그다지 연고도 없는 분을 모시는 경우도 있고요. 또 어떤 때에는 일부러 그 훌륭한 학자의 문하생이 되기도 하더군요. 한 두어 달쯤 가서 배우고 익히고 와서 그분의 문하생이라 자칭하고 뒷날 그 학자를 배향하기도 하더군요.
일단 서원으로 승인이 나면 노비와 책을 나라에서 내려주고 세금 또한 면제가 되니 그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다 보니, 우후죽순 마구잡이로 서원이 생겨나 지역에서 큰 특권을 누리게 되는 거지요. 또 이름난 학자는 여기저기서 다 배향하게 되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 때에도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는데 이러한 폐단 때문이었다고 해요. 그 뒤부터는 서원 한 곳에서만 한 사람을 모실 수 있도록 하고 중첩된 서원은 모두 철폐를 했다고 합니다. 그 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그 폐단은 더욱 심해져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 47개 서원을 놔두고는 모두 훼철되고 맙니다.
모든 서원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그런 모순된 점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그 뒤로 근대에 와서 다시 지역 유림들의 뜻으로 서원이 다시 복원된 곳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당도 또 서원이라 할지라도 가장 근본이었던 옛 배움터의 강학 기능은 사라졌지요.
이제는 다만 서원에서 지역의 훌륭한 옛 인물들을 모시고 제향 하는 기능만 남아 있습니다.
느닷없이 이런 생각이 드네요.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서당'의 순기능을 하는 곳이 몇 곳이나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가끔 댓글로 알려주는데 어릴 적에 서당에서 훈장님께 천자문을 배웠다는 분들도 더러 계시기는 하더군요.
봉암서당 아래에는 눈에 띄는 옛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감빛 양철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인데 아마도 여기가 옛 <봉암서당>이었나 봅니다.
건물은 낡았고 곧 쓰러질 듯한데 기둥에 주련(기둥마다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붙이거나 그 내용을 얇은 판자에 새겨 걸어둔다)을 걸어둔 게 보입니다.
조금 아래 동편에 또 하나의 건물이 있는데, 역시 명륜당 편액을 걸었으며. 역시 정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 철기와지붕이고, 중당협실형으로 정면에는 자연석 주초에 모두 원기둥이다. 주련(柱聯)을 11개나 달았고, 鳳巖書堂上樑文·鳳巖書堂移建記·還建舊基時上樑文 편액이 걸려있으나 건물을 대표하는 편액은 없고, 보수의 손길이 시급한 실정이다. 상주시 문화원 글 중에서... |
여기도 들어가서 보고 싶은데 못 들어갔답니다.
앞에는 어떤 집이 있고 그 집 마당을 거쳐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서 갈 수가 없더라고요.
멀리 서서 줌을 당겨 사진만 겨우 찍었는데 어렴풋이 왼쪽에 명륜당 현판이 보이고 기둥마다 주련들도 보이더군요.
옛날에는 서당과 함께 관리사인 고직사도 함께 있었다고 하던데 아마도 이 건물이 옛 봉암서당이었지 싶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복원을 한 것 자체 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이겠지요?
그래도 옛 서당도 어떻게 잘 고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상주 목사 신잠 선생이 세운 18개 서당 가운데에 세 번째로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 마을에 있는 <봉암서당>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그와 함께 조선시대 서당의 수업료는 얼마였는지, 또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당과 서원의 순 기능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모순된 기능 또한 살펴봤습니다.
이다음에 들려드릴 네 번째 이야기는 상주시 은척면에 있는 <죽림서당> 이야기랍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 제가 꾸리는 한빛국가유산TV에서 소개한 영상도 함께 보세요.
https://youtu.be/Vt-Wx9Nh3aw?si=tHWUHB2DvZlr4E36
봉암서당(鳳巖書堂) 상주시 화동면 선교서당마길 131
https://sunnyhanbit.tistory.com/368
https://sunnyhanbit.tistory.com/369
https://sunnyhanbit.tistory.com/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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