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화동면 선교리 마을에서 상주 목사 신잠 선생이 세웠다는 봉암서당을 둘러보고 가까이에 또 다른 볼거리가 있어 왔어요. 여기는 화동면 판곡리 마을이랍니다.
조선 초기에 심었다는 <낙화담 소나무>
고려 말 황간 현감이었던 본관이 청도인 김구정(金九鼎)이란 분이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을 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은둔할 곳을 찾아 이곳 상주 판곡리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 개국과 함께 시작된 소나무의 역사가 꽤 깊네요.
소나무의 형태가 가지가 휘휘 늘어져서 처진 소나무라고도 합니다.
이 소나무의 정식 이름은 <낙화담 소나무>입니다.
청도 김씨 상주파 종중의 시조인 김구정 선생이 터 잡았을 때, 백화산이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걸 다스리려고 연못을 만들고 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안내판이 있기는 하나 글자가 많이 희미해져 읽기가 어렵네요.
아무튼 나무 높이 약 13m, 가슴높이 둘레 약 2m, 나무의 지름이 약 20m나 되는 소나무랍니다.
지금도 굉장히 푸르고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우뚝 서 있지요.
관리도 꽤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훌륭한 나무도 두어 차례 위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1964년 나무에 그네를 매달고 타도 될 만큼 건강했었는데, 둘레에 방앗간에서 흘러나온 기름 때문에 몸살을 앓으면서 죽을 위기에 있었다고 해요.
마을 주민이자 청도 김씨 후손인 김재궁 어른이 오염된 흙을 새로운 흙으로 갈아주어 살려냈다고 합니다.
또 1992년에는 해충 때문에 위기를 맞았으나 역시 이분께서 여러 전문가들한테 자문을 구해 살려냈다고 합니다.
이렇듯 나무에 정성을 들이고 잘 가꾼 까닭에 500년 넘은 나이에도 아름답고 멋진 자태를 뽐내며 서 있네요.
우리나라 연못은 거의 네모난 형태가 많지요.
'하늘은 둥글고 땅(세상)은 네모지다'라는 '천원지방 사상'때문인데요. 여기 낙화담은 둥근 모양이네요.
이 낙화담은 그 옛날에는 4900㎡(약1482평)였는데, 지금은 190㎡(약 58평)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차이가 나네요.
그런데 이 낙화담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매우 슬프고 안타깝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쳐들어와 청도 김씨 일가들과 마을 사람들을 헤치려고 했답니다. 그때 마을 여인들이 왜구에 몸을 더럽히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이 연못에 스스로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정절을 지켜낸 연못이라 하여 <낙화담>이란 이름이 붙여진 거랍니다. 소나무 역시 <낙화담 소나무>가 된 거지요.
임진왜란 의병을 모아 몸바쳐 싸운 김준신 의사
낙화담 소나무 옆에는 큰 시비(詩碑)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 판곡리에는 임진왜란 때에 김구정 선생의 후손인 김준신(金俊臣) 의사가 32세에 의병을 일으켜 모집하고 왜군에 맞서 싸운 충신의 이야기가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충심과 넋을 기리는 빗돌인데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쓴 시랍니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았네
절사곡(節士谷)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라.
설악(雪岳) 높은 본 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 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도 낙화담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노산 이은상 선생이 1973년에 쓴 <낙화담 의적 천양시(落花潭義蹟闡揚詩)>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준신(1561-1592) 의사는 32세의 나이로 나아가 의병을 소집하여 솔령장(率領將)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칠곡 석전까지 전진하였다가 다시 상주 본진으로 돌아와 상주성을 지키려고 많은 왜적을 도륙하였으나 그 힘에 밀려 끝내 안타깝게도 임진년 4월 25일에 돌아가셨답니다.
상주시 만산동에는 <임란북천전적지>가 있답니다.
이곳에 김준신 의사의 넋을 기리는 빗돌이 있지요. 예전에 찍어둔 사진을 찾아보니 있어 덧붙입니다.
임란북천전적지에는 다섯 개의 빗돌이 있는데 이 가운데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준신 의사를 기리는 빗돌입니다.
또 의병장 김준신 의사를 기리는 충신의사단비도 있답니다.
임진왜란 때, 의사의 활약에 화가 난 왜적들이 판곡리 마을을 찾아가 김 씨 문중 사람을 멸하려 하자 죽어도 왜적의 손에는 죽을 수 없다 하여 낙화담에 스스로 뛰어들어 목숨을 버린 이 절부들의 이야기가 바로 낙화담에 담긴 슬픈 이야기랍니다.
굳게 잠긴 김준신의사 제단비
판곡리 마을의 <김준신의사 제단비>는 아쉽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습니다.이럴 땐, 좀 허탈합니다.
관리자라고 전화번호를 남겨놓기는 했지만 사실 일부러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엔 좀 부담스럽지요.
이 안내판도 글자가 많이 희미합니다.
김준신 의사 제단비는 임진왜란에 왜군과 맞서 싸우다 죽은 김준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조선 철종 1년(1850)에 비석을 세우고 이후 재실로 첨모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첨모재는 1993년에 철거 후 원형대로 고쳐 지었다.
김준신은 판곡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의병을 모집해 활약하였다. 상주성을 사수하다가 북천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특히 정조는 김준신을 의사라 칭하였으며 순조 20년(1820)에는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아쉽지만 담장 너머로 짐벌을 높이 올려서 찍어봅니다.
모퉁이를 돌아가서 찍기도 하고요.
또 왼쪽으로난 길을 따라가면서 높이 들어 찍기도 했네요.
사진을 찍을 때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인데 저도 그야말로 사진으로만 구경하고 있네요.
아마도 청도 김 씨 문중 사람들을 기리는 빗돌과 제단인 듯합니다.
아이고~ 담장이 왜 이리 높대요?
아하~! 가장 뒤쪽에 있는 건물이 제단비각인가 봅니다.
망원으로 가까스로 당겨서 겨우 이 건물이 무언지 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문화유산이나 역사인물의 이야기가 담긴 곳에 찾아갔을 때 문이 잠겨 있으면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둘러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살펴보며 어려운 한자이지만 떠듬떠듬 읽어도 보고 해야 느끼는 게 있고 그 인물에 대해 감동도 하고 또 많이 배우기도 하지요. 돌아와서 이것저것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에 견줄 수는 없답니다.
아무튼 이번 판곡리 나들이에서는 김준신 의사보다도 낙화담에 몸을 던진 여인들의 이야기와 오랜 세월 꿋꿋이 살아오며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지켜봤을 낙화담 소나무가 더욱 가슴 뜨겁게 와닿았네요.
낙화담 소나무 -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477
김준신의사 제단비 -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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