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제가 <한빛국가유산TV> 기획 영상으로 상주 목사 신잠 선생께서 세웠다는 18개 서당을 하나하나 찾아가 보기로 하였답니다.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공부를 해가며 찾아가서 답사를 하고 촬영을 하여 유튜브 영상으로 담아 소개를 했습니다.
영상과 함께 티스토리에 우리가 찾아낸 서당 한 곳 한 곳을 글로 담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서당 11곳과 터만 남은 서당 3곳, 그리고 정확하게 어디인지 어떤 자료도 없고 정보도 없어 알 수 없는 곳이 4곳이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은 아래 링크로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IoCr0lCvpmQZWg42KjmsrGjSC4MTRdRu
오늘은 저희가 찾아낸 서당 11곳 가운데에 첫 번째로 상주시 청리면 수선로 187에 있는 <수선서당>을 소개합니다.
신잠 선생이 상주 목사로 부임해 온 때가 1552년(명종7)이랍니다.
그런데 선생의 생몰은 1491~1554년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시기 두 해 앞서 상주 목사로 부임해 와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해내셨군요. 상주 목사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수선서당은 청리면 청하리 하현마을인데 청하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랍니다. 마을 가장 위쪽에 있는 <청상 저수지> 바로 앞 도로 가에 있는 서당이랍니다.
이곳은 찾기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답니다. 예전에도 이쪽으로는 몇 차례 다녀봤지요. 그리고 이런 사연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서당 건물이 있어 한 번 꼼꼼하게 보고 사진도 찍고 갔던 적이 있었답니다. 그랬는데 이번에 신잠 목사가 세운 서당에 이곳이 포함되어 있을 줄이야~! 사실 그때도 안내판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봤을 텐데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보고 넘겼나 봐요.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진리이군요.
수선서당 앞에는 빗돌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요. 낮은 담장 안쪽에 있답니다.
안내판을 꼼꼼히 읽어 봅니다.
안내판 글자가 희미해져서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읽을 수는 있네요.
창석 이준 선생이 쓴 '수선서당기(修善書堂記)'에 따르면 신잠 목사가 수선산 아래에 유람을 왔다가 산수가 수려한 것을 보고 선비들이 학문을 할 만한 곳이라 여겨 마을 어른들과 상의하여 서당을 짓고 손수 <수선서당 (修善書堂)> 네 글자를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고 합니다.
수선서당 앞에 핀 배롱나무꽃이 참 예뻤답니다.
신잠 선생이 상주 목사로 오기에 앞서는 태인 현감을 지냈는데, 그곳에서도 좋은 정치를 베풀고 백성을 구휼하는 데에 매우 힘쓴 분이라고 합니다.
태인현감으로 7년 동안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거기에서도 서당을 세워 학문에 힘쓰게 했고 또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고 절개와 의를 숭상하여 염치를 알도록 하였으며, 거처하는 방의 벽면에는 청렴, 신중, 근면을 크게 써서 붙이고 벼슬하는 법도로 삼았다고 합니다.
정읍 태인에 가면 피향정 둘레에 신잠 목사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가 있고 백성들이 세웠다는 성황당 안에 신잠 목사상, 부인상, 장자상, 시녀상, 호랑이상까지 만들어 기렸다고 합니다.
오오~ 역시 신잠 선생,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네요.
여기 상주에서도 역시 선생의 덕과 선정을 기리는 유애비가 수선서당 앞에 있답니다.
상주 목사로 있을 때 흉년이 들었는데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는데 상주 목사 신잠이 가장 으뜸이다'라고까지 했답니다.
수선서당 편액입니다.
서당에 걸린 편액인데 낙관 같은 건 안 보이네요.
신잠 목사께서 손수 현판에 네 글자를 썼다고 했는데, 이것이 그 진본인 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좋은 정치를 베풀고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니 선생을 기려 유애비를 세우는 건 매우 마땅한 것이겠지요?
유애비(遺愛碑)는 송덕비(頌德碑)와도 같은 말입니다.
그 유애비를 1557년에 세웠다고 합니다.
유애비의 내용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고 여러 폐단을 없앴으며 노역과 세금도 공평하게 하여 혜택이 백성한테 골고루 돌아가게 했다고 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상주 목사를 지내다가 1554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3년 뒤에 세운 것이네요.
오른쪽에는 좀 더 작은 빗돌이 있는데요. 처음 세운 유애비가 마모되어 새로 새긴 비라고 합니다. 새로 새겼다는데 오히려 글자가 더 안 보이네요.
상주에서 이름난 선비들인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 형제를 비롯한 이름 있는 선비들이 여기 수선서당에 와서 학문을 한 곳이라고 합니다.
수선서당기(修善書堂記)를 썼던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년 ~ 1635년) 선생은 조선 중기의 형조좌랑, 첨지중추부사, 승지, 부제학을 지낸 문신으로, 임진왜란(1592), 정묘호란(1627)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흥양이공태하공적비(興陽李公台河功績碑)
아마도 그분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로 생각되는데,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잘 알 수는 없네요.
태하(台河)라고 하는 말이 무얼까? 궁금하네요. 태풍과 물을 다스렸다는 뜻일까요? 아무튼 한자에 까막눈이라 흑흑흑
신잠 목사의 선정을 기리는 유애비 2기와 흥양이공태하공적비(興陽李公台河功績碑)
수선서당은 대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서 볼 수는 없었답니다. 대신에 담장이 낮아서 안쪽을 살펴볼 수는 있네요.
보통 서당 건물 앞쪽에 서당의 이름이 적힌 편액이 걸려 있고 안쪽 대청 위쪽에는 강당의 이름이 적힌 현판을 걸어두는데 강당임을 알리는 명륜당(明倫堂)은 현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글씨를 써서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네요. 이런 풍경은 처음 보는 겁니다.
수선서당은 앞면 3칸, 옆면 1.5칸인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가운데 대청을 2칸으로 하고 오른쪽과 왼쪽에 온돌방을 둔 구조인데 이런 형태를 '중당협실형'이라고 합니다.
서당 건물 치고는 굉장히 현대식이지요?
새롭게 고쳐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처음에 신잠 목사께서 수선산 아래 청효현 마을 들머리에 서당을 세웠지만, 터가 좁아 서쪽 개울가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03년(선조 36) 철암산(鐵岩山) 아래로 옮겨 세웠고요.
1987년 청상 저수지가 생기면서 청하리 옆으로 옮겼고 또 2015년에 지금 이 자리에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아아, 그래서 그렇군요.
건물이 진짜 현대식 서당입니다. 여러 번 옮겨 다녀서 서당 치고는 건물에 쓰인 재료들이 낯설기만 합니다.
낮게 쌓은 기단은 화강암(아니면 시멘트)으로 보이고요. 원기둥으로 된 다섯 개 기둥은 시멘트로 보이네요.
또 2015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라 조금은 고풍스럽기는 하지만 너무나 현대식입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선서당의 원형은 많이 변형되었고 그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어 매우 안타깝지만 그래도 신잠 목사께서 손수 서당 이름을 글자로 써서 현판으로 걸었던 서당이고 선생의 선정을 기리는 유애비가 그대로 남겨져 있어 매우 뜻깊은 곳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상주 목사 신잠 선생이 세웠다는 18개 서당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청리면 청하리에 있는 수선서당을 소개했습니다.
이다음 두 번째 이야기로는 8개 문중이 함께 참여해서 운영하는 <백화서당>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제가 꾸리는 한빛국가유산TV에서 소개한 영상도 함께 보세요.
https://youtu.be/O-2GDv8NWes?si=zeN98swY9Wog4ilq
수선서당(修善書堂) 상주시 청리면 수선로 187
https://sunnyhanbit.tistory.com/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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