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에는 그 옛날 마을 이름이 <소곡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 이름이 <효곡리>로 바뀌게 된 건 어떤 분의 효행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마을 이름까지 바꿀 만큼 효성스러운 한 선생을 만나러 갑니다. 바로 여산 송 씨(礪山 宋氏) 우곡(愚谷) 송량(宋亮)(1534~1618) 선생이랍니다.
선생의 이야기가 담긴 곳은 바로 <효곡재사>입니다.
효곡재사는 송량 선생의 덕을 기리려고 그의 손자인 송영(宋穎)이 숙종 때 효곡서원(孝谷書院)으로 처음 세운 곳이랍니다.
그 뒤 다시 정조 때에 자리가 좁아서 이곳으로 옮겨서 서원의 강당과 사당을 합해서 <효곡재사>가 되었답니다.
송량 선생은 성운과 이황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분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준, 정경세, 김각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기도 합니다.
한강 정구(鄭逑) 선생의 추천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됐고,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한성참군(漢城參軍) 등 여러 벼슬을 지낸 분입니다.
또 1566년에 노기, 정국성과 함께 13개 문중이 힘을 모아 '낙사계'를 만듭니다. 낙사계는 애민정신을 앞세워 지역민들한테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세워진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이 있습니다.
존애원은 임진왜란으로 질병에 시달리는 상주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세운 이곳에서는 모든이한테모든 이한테 열린 의료기관이었다고 합니다. 찾아오는 이가 누구이든 그 신분의 낮고 높음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이한테 진료를 해주고 약재도 내어주었다고 합니다.
https://youtu.be/SgFoxKU5snY?si=C62bo-53h5Z2lkZi
'존애원'이란 이름도 '존심애물'에서 따온 말인데요.
'마음을 지키고 길러 남의 사랑한다'라는 뜻이랍니다.
효곡재사는 앞면 4칸짜리 건물인데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마루턱이 조금 높은데 나무 계단을 가운데 두었네요.
앞쪽에 있는 기둥이 모두 원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효곡재사 백원당을 빙 둘러싼 담장의 곡선이 매우 아름답네요. 담장 너머로 배롱나무꽃이 무척 예쁩니다.
그 너머 있는 건물은 사당인
양쪽 옆면에다가는 쪽마루를 두었습니다.
쪽마루도 놓고 옆쪽으로도 문을 하나 냈습니다.
효곡재사의 당호는 <백원당(百源堂)>입니다. 대청도 굉장히 넓습니다.
양쪽 온돌방은 크기도 같고 모양도 둘 다 똑같답니다.
방문이 조금 남다르네요.
큰 문 가운데에 쪽문을 따로 달았습니다. 양쪽 방이 모두 똑같이 만들었더군요.
저 쪽문을 보니, "아무개 왔냐?" 하며 문을 열고 어른께서 내다보실 듯합니다. 하하하
문고리 위에 저건 뭘까요?
그냥 장식일까요?
뒤쪽으로도 문을 두 개나 내놨습니다.
저 문 열면 엄청 시원하겠지요?
대청에서 내다보는 뜰입니다. 기둥이 각지지 않은 원기둥이라 답답함이 없습니다.
오호~ 건물 뒤쪽에도 이렇게 쪽마루를 놓았네요. 그 아래로 굴뚝이 세 개나 보입니다. 방은 두 개였는데?
사당으로 들어가는 신문입니다. 담장이 참 예쁩니다.
아하, 굴뚝이 세 개가 아니라 네 개였네요. 방마다 두 개씩 두었나 봅니다.
사당 안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바로 배롱나무입니다.
그런데 나무의 나이가 굉장한데요? 2014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341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효곡재사가 처음 세워졌을 때와 비슷할 듯하네요.
배롱나무꽃이 드리워진 효곡재사 사당입니다.
겹처마로 되어있고 단청이 칠해진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사당은 모두 큰 원기둥으로 되어있고요. 여느 사당처럼 삼문(三門)입니다.
겹처마는 보수를 했을 때 단청을 새로 칠하지 않은 듯 보이네요. 칠이 된 것과 안 된 것이 함께 보입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송량 선생의 성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충효 정신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하늘이 내린 듯한 효자였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묘소를 살폈는데, 비바람이 불지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가 살던 마을을 ‘효곡(孝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추천을 받아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여러 능에 올리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자, 다만 능 참봉의 관직을 지낸 사람들에게 분향(焚香)한 사실을 초하루에 글로 써서 보고하도록 했다. 어느 날 임금이 내시를 보내 일일이 살펴보도록 하니, 오직 헌릉에서만 제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도록 명령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공을 세워,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효곡서원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여지도서(輿地圖書)>
★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757년(영조 33) ~ 1765년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전국 지리지입니다. ★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나물밥만 먹고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과일마저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돌보는 지극한 효심으로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런 송량 선생의 효심과 충성심을 높이 사 나라에서 불천위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했답니다.
불천위(不遷位)란 국가에 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학자를 나라에서 정하여 4대 봉사 후 신주를 조매(祧埋)하지 않고 제사는 것을 말한다. 불천위를 두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고도 부른다. 이를 불천지위(不遷之位)라 한다.
* 조매(祧埋)는 깨끗한 곳에 신주를 묻고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4대 봉사 후에 신주를 사당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일컬으며, 이로써 기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게 된다. 이는 사당에 모신 신주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효를 몸소 실천한 송량 선생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도 언제나 감탄했는데, '소곡리'였던 마을 이름마저도 '효곡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송량 선생의 효성스러운 성품을 보고 마을 이름까지 바꿀 정도이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여산 송씨 송량 선생뿐 아니라, 아들 둘과 딸 둘 또한 효와 절의를 지킨 분들이라고 합니다. 한 집안에 아버지 송량 선생의 효심은 말할 것도 없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는 충심을 높이 산다면, 그의 아들 둘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효도하고, 또 딸 둘 역시 절의를 지킨 열부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송량 선생의 집안이 '충효열'의 상징이 된 것이랍니다.
이 글에 뒤이어 그 '충효열'을 상징하는 <송량일가 정려문>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
효곡재사 -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516
★ 우곡 송량 선생 이야기를 제 유튜브 채널 <한빛국가유산TV> 영상에 담았습니다. ★
https://youtu.be/Nqdl_OFn5T8?si=xs-HwNe5-6UYGR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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