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소개한 우곡 송량 선생을 기리는 <효곡재사>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선생의 아들과 딸의 효심과 절의를 기려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세운 정려각이 있습니다. 바로 <송량일가 정려문>입니다.
효곡재사로 들어가는 들머리 길에서 오른쪽으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송량일가 정려문>이 있습니다.
효곡재사로 들어가는 길 들머리에는 유허비 하나가 우뚝 서 있습니다. 바로 우곡 송량 선생의 할아버지인 송세휘(宋洗輝) 선생의 유허비입니다.
(禦侮将軍 行龍驤衛 副司直 礪山宋公 諱 洗輝 遺墟碑(어모장군 행용양위 부사직 여산송공 휘 세휘 유허비)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나라가 혼란스럽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마을로 내려와서 터를 잡고 살게 된 여산 송씨(礪山 宋氏)의 입향조가 됩니다.
바로 입향조 송세휘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가 들머리에 서 있는 겁니다. 이 마을이 여산 송씨 집성촌이라고 합니다.
유허비 앞에서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효곡재사로 가는 길이고요. 유허비 앞 찻길로 위쪽으로 200여 미터 더 가면 소를 키우는 농장이 있습니다.
이 농장 앞으로 난 길(사진에 보이는 길)로 가는 게 아니라 그 옆쪽(사진에서 풀이 보이는 방향)에 보면,
이렇게 작은 오솔길이 있습니다.
사진 속 저 나무 뒤쪽에 <송량일가 정려문>이 있습니다.
정려각이 언덕 위에 있고 그 앞으로 울타리를 쳐놓았습니다.
가운데 울타리 문이 있는데 고맙게도 그냥 빗장만 걸어두었습니다. 열고 들어갈 수가 있어 기쁩니다.
송량일가 정려문 안내판에는 이 정려문에 어떤 이야깃거리가 있는지 잘 알 수 있도록 적었더군요.
우곡 송량 선생의 집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 집안 식구들이 모두 정려를 받았을까요?
우곡 송량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고 또 낙사계란 조직을 세워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 의료시설인 <존애원>을 세우기도 한 인물입니다.
이런 선생의 나라를 사랑한 충심과 지역민들을 생각하는 애민정신은 정말 널리 알려질 만하지요.
송량 선생의 아들인 송이회(宋以誨)는 어릴 적부터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사람들이 모두 피란을 갈 때도 혼자 향교로 달려가서 오성(五聖)[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위패를 깨끗한 곳에 묻은 후 부모를 모시고 백화산으로 피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저녁 왜구가 몰려와서 부모를 해치려고 하자 아들 송이회가 앞을 막아서며 왜구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안타깝게도 왜적의 칼에 희생되고 맙니다. 이때 송이회의 아우인 송이필(宋以弼)도 함께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두 아들의 희생으로 부모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답니다.
정말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효심 못지않게 왜적의 칼날 앞에서도 맞서며 아버지를 살려내고 대신 희생당했으니 참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무척이나 감동입니다. 그야말로 두 아들 또한 효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송량일가 정려문은 보호각 안에 정려가 두 개 걸려 있습니다.
왼쪽에는 아들 송이회, 오른쪽에는 딸(노경건의 처)의 정려가 걸려 있습니다.
딸도 둘이 있었는데 송량 선생의 아들 둘이 죽던 날, 노경건한테 시집을 간 딸도 함께 희생됩니다.
송량 선생의 딸이 노경건(盧景鍵)에게 시집을 갔는데, 노경건도 왜적한테 피해를 입었습니다. 송 씨가 “내 비록 남편과 함께 죽을지언정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꾸짖자, 왜구가 화가 나서 송 씨의 오른팔을 베어 냈지만 송 씨는 변절하지 않고 항거하다가 죽기까지 열부의 절의를 지킵니다. 안타깝게도 한 마을에서 같은 날 선생의 아들 둘과 딸이 이렇게 죽임을 당한 것이랍니다.
이 일 뒤로 세상 사람들은 한 집안에 효와 열의 두 절개가 있음을 모두가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1698년(숙종 24)에 고을 사람들이 송씨 일가의 사연을 적어 감사에게 올렸고, 1729년(영조 5) 가을에 효곡재사(孝谷齋舍) 가까이에다가 정려를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정려는 두 칸으로 나뉘어져있는데 왼쪽에는 송량 선생의 아들 송이회를 기리는 정려이고요.
오른쪽에는 송량 선생의 딸인 노경건의 처 여산 송 씨 부인을 기리는 정려입니다.
또 막내딸은 정이괄(鄭而适)한테 시집을 갔는데, 왜구를 피하여 호남 지방의 장수현(長水縣)에 들어가 살았는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갔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아버지 곁에 장사 지냈는데, 그런 뒤
“내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은 시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명이 박한 이 한 몸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통곡하면서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송량 선생의 충성심과 효심,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려고 왜적의 칼날에 맞선 두 아들의 효심, 또 딸 둘의 절의까지 모두 한 집안에서 '충효열'을 실천하였으니 이런 감동이 또 있을까요?
이런 훌륭한 송량 선생의 집안 이야기는 많은 이들한테 본보기가 되었지요. 나라에서도 감동하여 마을 들머리에다가 정문을 세우고
"100년이 지난 뒤라도 이 앞을 지나는 사람은 절하며 이 아버지에 이 아들과 이 딸이 있다는 것을 새길지어다”
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우곡 송량 선생 집안에서 충효열을 실천한 그런 영향이 있어서일까요? 효곡리 마을 가장 위쪽 웃왕실마을에는 또 다른 효자각이 하나 더 있답니다. <최만재 효자각>인데요. 병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날마다 목욕제계하고 기도를 올려 병을 낫게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마을 이름을 <효곡>이라 할 만합니다.
송량일가 정려문 -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산 109
최만재 효자각 -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171
★ 우곡 송량 선생 이야기를 제 유튜브 채널 <한빛국가유산TV> 영상에 담았습니다. ★
https://youtu.be/Nqdl_OFn5T8?si=5-dA_IqiVAv6T6W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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