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소개한 상주시 거동동에 있는 <무양동 석조귀부>를 찾아갔다가 뜻하지 않게 아주 귀한 말씀을 듣게 되었지요. 이야기를 듣는 중에 알았지만 선생은 젊은 시절, 서울대 농과대를 졸업하고 감 연구를 위해 고향인 상주로 내려오셨답니다. 그리고 대학 교수(경북대 상주캠퍼스)로 재직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박부인(84세) 전 교수님이시더군요.
귀한 인연 덕분에 석조귀부를 손수 발굴하셨던 이야기랑 또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말씀도 해주셨지요. 그 가운데에서 선생께서 감나무 연구에만 거의 온 삶을 바치며 살아오신 이야기도 들려주셨답니다. 워낙 좋은 말씀이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도 꼭 들려드리고 싶네요.
염라대왕은 죽어서 보는 게 아니야!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요?
하하하~ 저도 처음에 똑같은 반응이었답니다.
"염라대왕을 만나보셨수?"
"네?... 제가 아직 죽어본 적이 없어서요...."
"염라대왕은 죽어서 보는 게 아니야!"
당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시나? 하고 굉장히 의아했어요. 아니, 솔직히 스님들이 구도자한테 하는 말처럼 뭔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바로 알려주시는데 정말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내가 잘한 일은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으나 행여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내가 한 일, 그러니까 그 잘못은 오로지 나밖에 모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내 잘못이 행여라도 남들한테 들킬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그게 바로 염라대왕이라는 것입니다.
또 염라대왕은 늘 거울을 가지고 다닌다는데,
'거울은 언제나 사실만 비추지 가공해서 비춰주는 건 절대 없다!'라고 하시며 언제나 그 거울을 들여다보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요즘 정치인들한테도 거울 하나 선물해주고 싶다고 하셨어요. 하하하~!
"저기 위에 저 돌산은 언제부터 저렇게 있었나요?"
저 위에 보이는 돌산이 궁금해서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한숨을 푹 내쉬셨답니다. 여기에 있는 농원과 저 산도 모두 당신 소유였는데 저 산에 돌 좀 캐자고 해서 젊은 시절 돈을 받고 내주셨다고 합니다. 그 돈으로 자식들 모두 대학 공부 시키고 결혼도 시키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자연을 훼손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내내 마음이 쓰이곤 했답니다.
공사가 다 끝나고 난 뒤에 성심껏 제물을 준비하고 손수 제문까지 써서 올리며 정성 들여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국가 산업으로도 돌을 캐내어 수출도 하고 좋은 일이었지만 자연을 훼손했다는 것에 대한 죄스러움은 지금도 늘 반성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50여 년 감나무 연구에 바친 삶
'상주' 하면 떠오르는 게 뭔가요?
네. 바로 '곶감'입니다.
상주에는 어디를 가든지 감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답니다. 가로수도 감나무이니까요.
또 상주에서 쌀농사를 지어 벌어들이는 수익이 한 해에 1800 억 쯤 되는데, 곶감으로는 4,500~5,000 억을 벌어들인답니다. 그만큼 이곳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농사이지요.
선생은 이 '감' 연구에 온 삶을 바친 분이랍니다. 50여 년을 그렇게 살아오셨답니다. 상주하면 바로 곶감이 떠오를 만큼 이름나 있지만 옛날처럼 그런 호황을 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수익이 줄어든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감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또 깎고 가공을 해서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날이 갈수록 인구 노령화로 일손이 모자라고 또 하려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 살면서 일할 수 있는 이들은 노인뿐인데 이런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쉽게 감을 딸 수 있는 품종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키가 작은 감나무가 나왔다고 합니다. 보통은 2.5m쯤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어렸을 적에 뒤안이나 대문간에 있던 감나무들이 모두 키가 엄청 컸었던 기억이 납니다. 감을 따려면 긴 대나무 장대 끝을 반으로 갈라서 거기에다가 잠자리채 같은 그물망을 달아서 따곤 했었지요.(참고로 저도 고향이 상주입니다.)
그게 아니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하나 하나 따야만 했었거든요. 그땐 감 따다가 떨어져서 다쳤다는 얘기를 흔하게 들었었지요. 그런데 마치 사과나무처럼 키가 작은 감나무라면 정말 아이도 딸 수 있고 할머니도 손쉽게 딸 수 있겠네요.
키가 작으면서도 감 잎과 잎 사이(엽간葉間) 마디가 촘촘한 품종이랍니다. 감 잎사귀도 위로 말려있어 이 촘촘한 잎사귀들 틈에서도 아래쪽으로 빛이 골고루 들어갈 수 있다고 해요.
또 감에는 단맛 밖에 없는데 향기가 나는 감 품종도 개발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마치 구운 밤처럼 고소한 맛이 나는 고소미(가칭) 품종은 벌써 성공하신 단계라고 합니다.
곶감을 먹을 때 끈적끈적 이에 들러붙었던 적이 있지요? 이에 들러붙지 않고 향기까지 나는 곶감이라면 그만큼 소비도 늘어나겠지요. 지금은 그걸 연구하고 계시답니다.
감 농사부터 곶감 만들기까지 노동력도 줄이고 이에 붙지도 않으면서도 맛도 좋은, 거기에 갖가지 향기까지 더해진 곶감~! 참 놀라운 생각이고 멋진 연구의 열매이지 않습니까?
선생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되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당신은 여기까지만이라도 완성하고 가도 내 할 일 다 하는 셈이라는 말씀도 하셨답니다.
그러면서도 늘 농사꾼(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면서 덧붙인 말씀이 무척 가슴에 남는군요.
첫 강의 때 제자들한테 했던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학문 중에 가장 어려운 게 농사인데 농사는 천지신명이 짓는 것이다. 너희가 짓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이 감 연구는 내가 하지만 하늘과 땅이 내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농사꾼이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말씀이셨어요.
오늘 우리의 문화유산인 <무양동 석조귀부>를 찾아갔다가 뜻하지 않게 이걸 발굴하고 옮겨놓으셨던 주인공을 만나게 된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닌데, 들려주는 말씀마다 참으로 귀하고 뜻깊은 것이라 정말 소중한 인연이구나! 싶었답니다.
헤어지면서 '내가 선생을 했던 사람이라 잔소리가 많았을 거'란 말씀을 하셨지만 다음 일정이 아니라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도 좋았겠다 싶었답니다.
아, 하나 더!
헤어지면서 전화번호를 여쭤서 저장하고 왔는데 오늘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반가웠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인사를 나눴는데 제가 글을 쓴다는 걸 듣고 글을 쓸 때에도 조심해서 쓰라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옛날 같으면 종이에다가 연필로 쓸 테지만, 요즘은 노트북에다가 투닥투닥 쓰니까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쓸 때가 많을 거라면서 글 한 줄도 조심해서 살피라는 말씀이었어요. 저한테도 참 약이 되는 말씀이었답니다.
오늘 참 뿌듯하고 보람찬 날이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 박부인 선생께서 발굴한 <무양동 석조귀부> 이야기도 함께 보세요.
https://sunnyhanbit.tistory.com/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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