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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이 들려주는 국가유산 이야기

연산군의 폭정에도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던 허백당 <홍귀달 선생 신도비>

by 한빛(hanbit) 202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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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앞서 연산군의 폭정의 시작 무오사화(1498년(연산군 4년))에 희생된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선생 두 분이 함께 우정을 나누며 나라를 걱정하던 곳, 대구 <이노정>을 소개했지요. 이번에는 연산군이 일으킨 두 번째 사화 갑자사화(1504년(연산군 10년)) 때, 희생당한 허백당(虛堂) 홍귀달(洪貴達) 선생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문경시 영순면 율곡리 마을 건너편 넓은 터에 <홍귀달 선생 신도비>가 있습니다. 또 그 곁에 재실로 보이는 건물이 있더군요.
 
홍귀달 선생은 조선 성종 때, 형조와 이조참판을 거쳐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까지 지낸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높은 벼슬을 두루 지낸 분이시랍니다.

어느새 모가 많이 자라서 온통 푸릇푸릇 시원한 풍경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재실 앞에 차를 세워놓고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니, 저 위쪽에 큰 무덤이 보이네요. 혹시 홍귀달 선생의 무덤일까?

이 너른 돌판은 무얼까? 무덤 쪽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제단일까?

먼저 저 앞에 보이는 신도비를 둘러보러 갑니다.

멀리서 봐도 빗돌이 꽤나 큽니다. 비각 또한 크고 웅장해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서니 빗돌이 더욱 크게 보이네요.

때가 한여름에 다가서니 이런 곳에 오면 으레 잡풀이 무성해서 다니기가 꽤 힘든데, 여기는 그렇지 않았어요. 굉장히 깔끔하게 풀 정리가 다 되어있고 무척이나 깨끗했답니다.
까닭이 있었군요. 비각 둘레에 놓인 물건들을 보니, 누군가 부지런히 풀을 깎고 청소를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백당 홍귀달 선생의 고향은 경북 상주시 함창읍 여물리라고 합니다. 선생의 신도비가 있는 마을은 문경시 영순면 율곡리 마을에 있답니다. 상주와 문경의 경계이기도 합니다.

홍귀달선생 신도비 안내판
 
조선 초 문신이자 청백리였던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 선생의 신도비는 높이가 3.74m 너비 1.20m인데 꽤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비문은 1535년(중종 30) 당대 명문장가인 남곤이 글을 짓고 선생의 아들인 홍언국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홍귀달 선생은 홍문관 대제학을 두 번씩이나 지낸 재상이었답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으로 시작된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1504년) 때 희생을 당하였지요.
연산군의 첫 번째 사화였던 무오사화(1498년) 다음 해인 1499년에 신하들의 간언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한 어조로 상소를 올리고, 그에 이어 연산군의 사냥을 자제하라는 상소를 또 올렸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잇달아 왕의 잘못을 지적하며 갖가지 상소를 올리며 '바른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고 합니다. 끝내 경기도 관찰사로 좌천되기도 했지요.
 
그 뒤로도 선생의 바른말로 늘 연산군의 심기를 건드렸고, 또 후궁을 간택하려 양반의 여식들을 보내라 할 때, 손녀딸을 보내라는 명을 어기고 병을 핑계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네요. 끝내 함경도 경원 땅으로 유배를 보냈답니다. 유배를 가는 중에도 그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돌아와 곤장을 쳐서 보냈다고 하네요. 세상에나~!!!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 씨 폐출과 죽음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찾아내어 죽이며 피로 물들였던 숙청 사건인 갑자사화(1504년)의 시작이 이때 시작되었지요. 이 사화로 윤씨 폐출에 반대했던 홍귀달 선생이지만 연산군의 눈밖에 났던 까닭에 당시에 승지를 지냈다는 까닭으로 희생시키고 말았답니다. 그의 네 아들들도 모두 귀양을 보내었지요.
 

머릿돌인 이수가 꽤나 화려합니다.
몸돌에 쓴 비문은 워낙 오랜 세월 탓인지 글자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림홍씨 세덕록>에 원문이 실려있다고 합니다. 모두 2.523 글자로 쓰인 신도비입니다.

받침돌인 귀부는 거북이 모양입니다.

푸른 들판을 내려다보는 빠알간 접시꽃이 무척 예쁩니다.

연산군의 폭정에도 바른말을 하고 나라를 걱정했던 선생의 충심과 그 꼿꼿함이 그려집니다.

이번에는 아까 보았던 무덤에 가 봅니다.

무덤은 모두 3기입니다.
앞쪽에 2기가 있고 뒤쪽에 1기가 있습니다.

어떤 무덤이 선생의 무덤일까?
안내판이 따로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짐작은 하겠더라고요.
앞에 있는 쌍릉에 있는 빗돌보다 뒤쪽에 있는 빗돌 글씨가 훨씬 더 희미하더라고요.

* 다시 고쳐 씁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앞쪽에 있는 쌍릉이 선생의 무덤이랍니다. 홍귀달 선생과 부인의 무덤이라고 힙니다. (2024.6.27일 덧붙임)

뒤쪽에 있는 무덤 (홍귀달 선생의 무덤인듯 보여요.)라고 썼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사실은 앞쪽에 있는 쌍릉이 선생과 부인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앞뒤쪽 모두 문인석이 서 있는 걸 보면, 모두 높은 벼슬을 한 분들의 무덤은 틀림없습니다. 

선생의 무덤을 둘러보는데, 난데없이 까마귀 두 마리가 우리 머리 위를 빙빙 돌며 유난스럽게 울어댑니다. 낯선 이가 찾아와서 경계하는 듯 보였어요.

무덤 둘레에 돌담으로 빙 둘러싸고 꽤 너른 터에 자리 잡았습니다. 봉분도 꽤 크더군요.

뒤쪽에 있는 빗돌인데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더군요.

관복을 입은 문인석도 오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눈. 코. 입 윤곽이 매우 또렷하네요.

무덤 아래 들판에는 유월의 꽃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율곡리 마을 앞 논은 어쩌면 저리도 반듯하게 보일까요? 

율곡리 마을에 종택이 있다고 하는 글을 봤는데, 우리가 찾아간 이 날은 알지 못했어요.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네요.

빙 둘러싼 소나무들이 마치 호위를 하듯 서 있습니다.

 

8월에 배롱나무꽃이 활짝 필 때 가도 참 좋겠습니다. 

풍광도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은 홍귀달선생 신도비와 무덤을 둘러보고 나니, 조정의 피바람 앞에서도 꿋꿋하게 바른말을 하며 간언을 올리던 선생의 꼿꼿한 나라사랑이 잘 느껴지네요.
 

 

문경시 영순면 영풍로 848-5  

 

★ 제 유튜브 채널 <한빛국가유산TV>에 허백당 홍귀달 선생 이야기를 자세하게 영상으로 올렸습니다.

https://youtu.be/dEQq3NFgrp4?si=Vm1B3VGGfOYoTlWj 
 
https://sunnyhanbit.tistory.com/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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