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성주 땅에 살던 한 여인이 갓을 쓰고 사내 복색을 하고서 한양으로 나섰습니다.
궁궐 앞에서 임금이 행차하기만을 기다렸지요.
그러다가 숙종이 궁을 나섰고 그 행차 앞에 달려가 무릎을 꿇고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억울함을 눈물로 호소하는 이 남장 여인은 도대체 어떤 억울한 사연이 있었길래 이리도 결의에 차 있고 절절하단 말입니까?

얼마 앞서 벌써 세 번째 찾아간 이효각 앞 들머리입니다.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마을 들머리에 이효각이 있습니다.

지난 2021년 8월, 배롱나무꽃이 한창 예쁘게 피었던 때에도 가본 적이 있었지요. 한여름에 가면 흐드러진 배롱나무꽃이 아주 볼만 한 곳이기도 하지요.
여기를 왜 그렇게 자주 찾아갔냐고요?
아주 슬프고도 분하고 화나는 억울한 사연이 깃든 곳이라서 그렇답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조선판 파묘를 아십니까? 산송은요?

조선시대 사송(詞訟)이라고 하는 3대 민사소송이 무언지 아십니까?
바로 산송(山訟)이라고 하는 묘지에 얽힌 소송과 노비와 관련된 노비송(奴婢訟), 토지와 관련된 전답송(田畓訟)이 있답니다. 그 가운데 산송이라고 하는 묘지 소송은 풍수사상으로 명당에다가 조상의 묘를 쓰려고 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일인데요.
다른 가문의 선산에다가 몰래 자기 부모의 묫자리를 만들거나 남의 묫자리 둘레에 있는 나무를 베어낸다거나 하는 일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소송까지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마을은 옛 성주 고을이었습니다.
이 성주 땅에 살던 평온했던 가정에 큰 불행이 닥친 건, 대구 지역 권세가였던 '박경여'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박수하' 가문의 무덤에 몰래 자기 할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하면서부터였습니다.

죽산 박 씨 박수하는 가문의 수치로 여기고 관아에 이 일을 고발했지요.
그러나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송사는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송사가 늘어지자 박수하는 임금인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고 숙종은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라고 명을 내렸지요.
임금이 내린 명이었지만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몰래 할아버지의 무덤을 쓴 박경여는 묘를 단장하고 묘비까지 세웠습니다.

이에 화가 난 박수하가 박경여의 노비를 잡아다가 매질을 했고 이 일로 박경여는 박수하를 되려 관아에 고소를 했지요.

관아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박수하는
"박경여가 경상감사와 친인척 관계인데 어찌 조사가 공정할 수 있냐"
고 따졌고 이 말을 들은 경상감사는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경상감사가 직접 박수하를 심문하였는데, 박수하는 이 일로 그만 태장을 맞고 7일 만에 죽어버렸습니다.
박수하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권세가였던 박경여한테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요.
이때 화가 단단히 나 있던 첫째 딸 문랑이 박경여의 할아버지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관에서 꺼내어 불을 질러버리고 맙니다.
발끈한 박경여가 하인들과 사병을 무덤으로 보냈고 그 무리 속으로 칼을 들고 달려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첫째 딸 문랑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문랑의 사병의 창에 맞아 죽고 맙니다.
문랑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억울한 일입니다.
자기 집안의 선산에다가 남이 몰래 무덤을 쓴 것도 억울한데, 이걸 해결하려고 소송을 걸다가 아버지까지 잃고 게다가 거기에 맞서던 첫째 딸 문랑마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일 또한 성주 관아에서 조사를 했고 곧 결과를 발표했는데, 세상에나! 이 죽음 또한 '자살'이라고 마무리를 짓고 맙니다.
숙종임금 앞에 머리 풀어헤친 남장여인의 비밀

이번에는 분을 삭이며 방법을 찾던 둘째 딸 효랑이가 나섰습니다. 이때 동생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갓을 쓰고 남장을 하고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궁궐 앞에서 임금의 행차만을 기다렸지요. 지난날 그녀의 아버지 박수하가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다가 드디어 숙종이 궁을 나섰고, 효랑은 그 행차 앞에 달려가 무릎을 꿇고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억울함을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숙종도 관심을 가지고 효랑의 사연을 귀 기울여 들었고 엄중하게 수사를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임금이 명을 내렸으나 시간이 걸리자 한양에 계속 머물던 효랑은 날마다 궁 앞에서 드나드는 관리들한테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효랑의 애절하고 안타까운 하소연에 사람들이 조금씩 동정을 갖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안동 지역 유림들이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이어 전국 곳곳에서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숙종은 다시 한번 엄명을 내려 조사를 지시했지요.
그러나 무덤을 몰래 쓴 박경여는 끝내 달리 처벌을 하지 않고 끝나게 되고 맙니다.
너무나 허무한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세가들의 태도나 악행은 치가 떨리게 합니다.

옛 성주 땅이었던 이곳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마을에는 이 억울한 사연을 품고 있는 문랑과 효랑 자매의 효를 기리는 정려각이 있습니다.
개인이 가진 욕심 때문에 조선시대 큰 사건이었던 문랑 효랑 자매,
이 억울한 사연과 효행 이야기는 뒷날 1724년(경종 4)에 언니 문랑한테 정려가 내려집니다.
효랑한테는 복호가 내려졌지요. '복호'는 충신이나 효자, 군인 등 공로가 있는 특별한 사람한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는 걸 말합니다.


만고 효녀 죽산 박 씨 증시 문랑 효랑 지비 (萬古孝女 竹山朴氏 贈諡 文娘 孝娘 之碑)라고 쓴 빗돌입니다.
그 뒤, 동생 효랑은 합천에 있는 남평 문 씨 문동도의 아들 문우징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5살 젊은 나이에 죽고 맙니다.
효랑의 정려 또한 시댁 쪽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내려졌다고 합니다.
문랑과 효랑 자매의 효행 이야기는 뒷날 영조가 명을 내려 효녀각을 세우게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정려비는 도암리에 세웠는데 동생 효랑의 비는 1916년 시가인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로 잠깐 옮겨가기도 했지요.

문랑의 비는 높이 50cm, 가로 30cm, 두께 10cm로 화강암에 '만고효녀 죽산박씨 증 시문랑지비'라고 새겨 있습니다.
앞면에 새긴 글자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 세운 것인지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문랑의 비는 왼쪽에 있는 작은 빗돌이고요.
오른쪽은 문랑과 효랑의 비가 있습니다.
만고 효녀 죽산 박씨 증시 문랑 효랑 지비 (萬古孝女 竹山朴氏 贈諡 文娘 孝娘 之碑)
이 빗돌은 사방에 모두 홍살창을 내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습니다.
죽산 박 씨 가문의 불천위 사당 청현사과 박원형

문랑 효랑 자매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이 있는 곳 바로 위에는 청현사(淸顯祠)가 있습니다.
청현사는 조선 초기에 문과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고 연성부원군에 봉해진 죽산 박 씨 박원형 선생과 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후손 대대로 끊임없이 제사를 지내라는 불천위 사당입니다.

박원형(朴元亨, 1411년 ∼ 1469년) 선생은 1455년 세조가 왕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도승지에 오르고 좌익공신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고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치는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습니다.

청현사 솟을삼문에는 숭덕문(崇德門)이라는 편액을 걸었고요.

사당 처마에는 '청현사 중수기'가 걸려 있더군요.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서인지 글씨가 잘 보이지는 않았답니다.

청현사 사당 뜰에도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시문이 뛰어났던 박원형 선생이 죽은 뒤, 성주 벽진면에 청현사를 세웠다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지요.

오늘 소개한 문랑 효랑의 빗돌을 두어 길이길이 기리려고 1979년에 이곳 죽산 박씨 가문의 박원형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청현사 아래에다가 <이효각>을 다시 세웠습니다.
선산을 빼앗기고 아버지마저 억울하게 죽게 한 조선시대 파묘 사건, 또 그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고 죽기까지 애썼던 첫째 딸 문랑, 그리고 아버지와 언니의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남장을 하고 한양까지 올라가서 임금과 세상 앞에 널리 알린 동생 효랑
이 자매의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깃든 묘지소송 사건이 바로 조선시대 '산송'이었습니다.
뒷날 1934년에 효녀 문랑과 효랑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문학작품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출천대효효낭전(出天大孝孝娘專)>이란 책이 나왔는데, 당시에 박경여의 가문 사람들이 이 소설이 나오는 대로 사서 불태워 없앴다고 하네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마을에 있는 이효각에서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라있는 큰 파묘 사건이자 3대 민사소송 가운데 하나인 묘지 소송인 '산송'을 둘러싼 문랑과 효랑, 그리고 아버지 박수하의 억울한 죽음을 들여다봤습니다.
오늘날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도 참으로 기가 막히고 원통하고 분한 일일 텐데 그 시대 그 시절 시대 배경에 견줘보니 참으로 억울한 이야기네요.
이효각과 청현사 -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263-1
★한빛이 꾸리는 유튜브 채널인 <한빛국가유산TV>에서 제작한 영상도 함께 보세요.★
https://youtu.be/jQM-fvx9d4k?si=9tZuCM2P16Yw6Y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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