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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이 들려주는 국가유산 이야기

아버지가 아들의 귀를 물어뜯었다고요? [문경 원모정 효공원]

by 한빛(hanbit) 2025.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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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송죽2리 마을풍경

예부터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은 곳이라 해서 송죽리라고 했고 덕암산 밑에 있다 하여 덕암마을이라고도 하는 곳에 왔습니다.

문경시 산양면 송죽2리 마을입니다.

송죽2리 덕암마을 표지석

1580년경 개성사람 고극근(高克勤)이란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송내촌(松內村)이라 하였으나 그 뒤,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이 마을이 그 바위의 덕으로 편안히 잘 산다고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바위가 용궁(용궁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용궁은 늘 물난리 피해를 많이 받는 곳이었다고 해요.

용궁 사람들이 이 바위 때문에 그렇다고 하여 이 바위를 부수려고 산위에 몰려가자 갑자기 천둥과 벼락이 쳐서 일부는 죽고 남은 사람들은 도망을 쳤대요.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덕암'이라 하여 보호하게 되었고 마을 이름도 '덕암'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지극한 효자 '고응두'를 기리는 원모정과 효공원

효공원과 원모정

우리나라 '효'를 기억하며 세운 정자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네요. 정자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바로 '효공원(孝公園)'입니다. 저 뒤쪽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우리가 찾아온 정자 <원모정>입니다.

원모정(遠慕亭)은 지극한 효자인 참봉 '고응두' 선생을 기리려고 선생이 돌아가신 뒤 300여 년이 지난 1930년에 그의 후손인 치당공 '고완' 선생이 세웠습니다.

문경 원모정

오래되어 낡은 정자를 지난 2018년에 고쳐지었습니다. 새로 고쳐지으면서 기문인 '원모정기(遠慕亭記)'를 번역해서 일반한테 공개했습니다. 이 원모정기에 따르면 이 정자는 효를 본받으려고 세운 거라고 합니다.

옛 선비들이 풍경 좋은 곳에 자연과 어우러져 세우는 다른 정자와 달리 마을 한복판에 정자가 있는 까닭이 바로 이 효를 널리 본받게 하려는 뜻이 담겨있는 겁니다.

원모정

원모정은 다행히 문을 잠가놓지 않아서 들어올 수 있었답니다. 

마당에는 개망초가 웃자라 있었지만 이 정도면 나름대로 관리가 잘 되고 있다 봐야 합니다.

원모정 편액

원모정 대청 위에 현판들이 여러 개 걸려 있습니다.

대청도 아주 시원합니다. 대청 앞으로는 계자난간을 둘렀네요.

원모정 현판(원모정기, 원모정 상량문 등)

아버지가 아들의 귀를 물어뜯었다고요?

앞면 4칸, 옆면 2칸짜리 건물이라서 대청이 꽤 널찍합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있네요. 

눈치채셨나요?

저기 방문 앞에 걸개막이 하나 걸려있는데 그림이 아주 남다릅니다.

원모정에서

이 그림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 가는 모습인데 목덜미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그림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이 마을에 임진왜란 당시 '고응두(高應斗-1564∼1627)'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왜적이 쳐들어오자 팔순 아버지를 등에 업고 피란길에 나섰습니다.

왜적이 턱밑까지 따라오자 등에 업힌 팔순 아버지는 아들 걱정에 자기를 내려놓고 혼자 피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버리고 갈 수는 없지요. 효심이 남다른 아들은 그럴 수 없다며 더욱 힘을 주 아버지를 둘러업고 달렸습니다.

그러자 등에 업힌 아버지는 아들의 귀를 물어뜯으며 내려놓고 가라고 몸부림쳤지요. 귀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고응두는 끝까지 모른채하고 내달렸답니다.

하지만, 곧 왜적한테 붙잡히고 맙니다. 뒤쫓아오던 왜적들도 이 모습을 다 지켜보았는데요. 아버지의 자식 사랑과 고응두의 효심에 감동해 이들을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저 위에 걸개막 그림이 바로 이 장면을 보여준 거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효심이고 또 아름다운 아들사랑입니다.

고응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동안 시묘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뿐아니라, 임금인 선조가 승하했을 때에도 3년동안 소복을 입고 지냈다고 하네요. 
'효'를 한자로 '孝' 자인 거 다들 아시지요?
노인 노(老)자와 아들 자(子)를 합친 것으로 늙은(노, 耂) 부모를 아들(자 子)이 업고 있는 모양으로 자식이 나이드신 부모님을 잘 봉양하라는 의미이지요.
그만큼 백행의 근본이 되는 '효'를 잘 나타내주는 뜻이라고 봅니다.

원모정에서 효를 배우다

나이드신 팔순 아버지를 업고 귀를 물어뜯기면서도 절대 놓지않고 아버지를 살리려고 했던 아름다운 효심을 잘 말해주는 정자 원모정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경상도 관찰사(경상감사)가 전해듣고 그의 효행을 조정에 추천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인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내려주고, 참봉(參奉)을 증직(贈職)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충신(忠臣)을 효자(孝子)에서 찾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했으며, 그 뒤로 이런 사실을 창석 이준(瘡石 李埈)이 상산읍지에 ‘조란실기(遭亂實記)’로 기록했고,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도 ‘효행록(孝行錄)’을 지어 남겼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효심을 널리 전하려 원모정을 세운 치당 고완
이 원모정을 세운 분은 고응두 선생의 10대 후손인 치당 '고완' 선생인데요.
정자를 지으면서 이런 뜻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무릇 세대가 멀어질수록 선조의 아름다운 행적이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땅을 팔아 터를 정하고 기꺼이 정자를 짓는 비용을 단독으로 부담해 여덟 칸의 정자를 세우고, '원모정(遠慕亭)'이라 하니, 이는 '세대가 멀어질수록 더욱 선조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치당고택(개성고씨가옥)

송죽2리 덕암마을에는 원모정을 세운 치당 고완 선생과 그의 아들 고석림이 지은 살림집이 따로 있더군요. '치당고택'이라고도 하고 '문경 송죽리 개성고씨가옥'이라고도 합니다.

이 치당고택에도 가봤는데, 여기는 그 후손이 살고 계시더군요. 인사를 드리고 아주 짧게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안채도 따로 있었는데 거기는 못 봤고요. 바깥 사랑채 쪽만 둘러보고 서둘러 나왔습니다.

이 송죽리 마을에는 개성 고씨 집성촌이라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여기뿐 아니라, 문경 곳곳에 '개성 고씨' 유적들이 굉장히 많은 걸 알았답니다. 두 차례에 걸쳐 몇몇 곳을 찾아서 둘러보기도 했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개성 고씨 유적들을 몇 곳 소개할까 합니다.

원모정 육각정 쉼터

끝으로 원모정 앞에 있는 육각정 쉼터에 걸려있는 주련이 눈에 띄어 소개합니다.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세종대왕이 친필로 이정간(李貞幹)에게 내린 가훈으로,

"가정에서는 충효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함과 공경을 지키라"

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주련에 담긴 뜻과 원모정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경 원모정 - 문경시 산양면 송죽리 32

★한빛이 꾸리는 유튜브 채널인 <한빛국가유산TV>에서 제작한 <문경 원모정> 이야기를 담은 영상 한 편 보고 가세요.★
https://youtu.be/JYjP9BJmJcI?si=KuPjiDjugG1S_L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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