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지리산 피아골 구례 연곡사에 있는 볼거리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편에서는 주로 연곡사의 풍경을 중심으로 전해드렸지요.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다'는 남명 조식 선생의 시처럼 아름다운 삼홍루(三紅樓)를 비롯해서 한글로 쓴 편액이 참 좋았던 관음전, 그리고 중심건물인 대적광전까지, 아 또 있네요. 종각도 참 멋졌어요.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전각들이 이 너른 터에 잘 어우러지게 있던 매우 아름다운 절집이 바로 연곡사였습니다.
아, 혹시 앞서 쓴 글을 못보셨다면, 보고 오셔도 좋아요. ^^
https://sunnyhanbit.tistory.com/186
고려 전기 승려 '현각선사탑비' 보물 제152호
게다가 아주 오래전부터 굉장히 많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롭게 거듭났다는 이야기도 잠깐 해드렸네요. 그런데 연곡사는 무엇보다도 매우 귀한 볼거리들, 무척이나 소중한 우리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소개해볼게요.
콧구멍이 뻥 뚫린 용의 얼굴이 인상 깊은 이것은 바로 <현각선사 탑비>라고 합니다. 보물 제152호입니다.
현각 선사 탑비는 고려 전기 승려인 현각 선사를 기리기 위해 경종 4년(979)에 세운 것입니다. 이 탑비는 가운데 몸돌인 탑신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螭首)만 남아 있답니다. 구례 연곡사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6.25 한국전쟁까지 세 번이나 큰 몸살을 치렀던 곳이라고 하니 무리도 아니겠지만, 이렇게 몸돌은 없어지고 머릿돌과 받침돌만 남아있는 게 매우 안타깝지요.
현각 선사 탑비 머릿돌인데요.
가운데 희미하게 글자를 새겨놓았어요. '현각선사비명(玄覺禪師碑銘)'이라고 쓰여있어요. 이것 때문에 이 탑비가 고려 현각 선사 탑비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머릿돌에는 구름 문양도 있고 용 여러 마리가 뒤엉켜 있는 모습이기도 하답니다.
받침돌은 거북이 모양이네요. 이런 받침돌을 귀부(龜趺)라고 합니다. 보통 거북이 모양이 많지요. 거북 등이나 발 모양이 굉장히 또렷하네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또렷한 걸 보니 참 놀랍습니다.
받침돌의 머리 부분은 커다란 용의 얼굴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게 콧구멍이네요. 진짜 시원하게 뻥~ 뚫어놓았네요. 하하하! 두 눈이 부리부리하고 입도 무척 크네요. 머리에는 작은 뿔도 하나 보이네요.
그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이렇게 정교하게 잘 만드는지 볼 때마다 무척 놀랍니다.
참, 받침돌인 귀부의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조각난 것을 복원해서 붙여놓은 거라고 합니다. 진짜 몸돌인 탑신만 있으면 완벽한데 아쉽네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이건 앞선 글에서도 잠깐 소개를 했는데요. 바로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입니다.
고광순 의병장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고경명, 고종후, 그리고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고인후 이 3부자 가문의 후손이랍니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절의가 남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분이지요.
구한말 의병대장인 녹천(鹿川) 고광순 선생이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항일의병이 되기로 합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각 읍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일본 침략에 맞서 항거하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호남 의병대장이 되어서 남원, 광주, 화순, 순천 등에서 선생이 손수 만든 태극기(불원복기)를 앞세워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고 합니다.
고광순 선생께서 '불원복(不遠復)' 태극기를 만들어 앞세우고 싸웠다는데 그건 바로 광복이 멀잖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태극기에다가 이 글자를 새긴 것을 들고 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네요. 선생께서 만든 불원복 태극기는 지금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뜨거운 열정과 오로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으로 이곳 연곡사에다가 본영을 설치하고 항전을 준비하던 1907년 10월 17일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마지막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치열하게 싸웠지만 일본군보다 약했던 의병의 전투력으로는 정면 대결이 쉽지 않았답니다. 이 날, 의병장 고광순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여기 연곡사에서 모두 장렬히 순국하고 맙니다.
바로 위 사진에 있는 저 자리, 동백나무 아래가 의병대장 고광순 선생이 순국한 자리라고 합니다.
대를 이어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운 고광순 선생과 또 그와 함께한 수많은 의병들은 이렇게 안타깝게 쓰러졌고 일본군은 의병의 근거지였던 이곳 연곡사를 두 번 다시 의병활동을 할 수 없게 모조리 불사르고 완전히 폐허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너무나 많은 수난을 겪었던 연곡사이기도 합니다.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고광순 선생이 순절비 바로 위에는 소요 대사 탑이 있답니다. 먼저 그 앞에는 보월당 영탑을 비롯해서 부도탑 4 개가 나란히 있고요.
이건 바로 조선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던 큰스님으로 잘 알려진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이랍니다.
소요 대사( 1562∼1649)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한 스님이기도 하답니다. 효종 원년인 1650년에 세운 부도탑이라네요. 팔각형 모양으로 된 이 부도탑은 새겨놓은 문양들이 화려하거나 복잡하지는 않지만 균형이 잘 잡혀있고 아름다운 품위가 느껴지는 모습을 하고 있답니다. 중대석과 상대석엔 연꽃 모양으로 만들었고 몸돌에는 팔부신중을 새겼네요.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경인(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庚寅)’
여기에도 탑에다가 새긴 글자 때문에 이 부도탑의 주인이 소요 대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순치 6년은 1649년이나 경인년은 1650년이라고 하네요. 이때는 아마도 청나라 연호를 썼나 봅니다. 순치는 청나라의 제3대 황제라고 합니다.
탑에 새긴 글자 때문에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이런 걸 만든 때를 알 수 있는 것도 참 놀랍고 재밌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렇게 쓰고 기록하는 것들이 먼 훗날에도 굉장히 소중하게 쓰일지도 모르겠네요.
구례 연곡사 동승탑(국보 제53호)
이번에는 연곡사에 있는 국보를 보러 갈 겁니다. 대적광전 오른쪽에 보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 석문을 지나서 올라갑니다.
오른쪽엔 대적광전, 왼쪽엔 명부전 그 앞으로 난 석문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왔어요.
짜잔~! 바로 여깁니다.
여기엔 국보와 보물이 나란히 있습니다.
오른쪽은 국보인 동 승탑이고 왼쪽은 보물인 동 승탑비입니다.
국보 제53호인 구례 연곡사 동 승탑입니다.
이 동 승탑은 통일신라시대 사리탑 가운데에서 가장 모양이 아름답고 장식이나 조각이 매우 정교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부도탑만큼은 정말 이다음에라도 꼭 가서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기를 추천합니다.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탑 아래부터 구름, 용, 사자상 등과 함께 가운데 몸돌에는 팔부신중을 새겼습니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은 불법을 지키는 8종의 신으로 천 · 용 · 야차 · 아수라 · 건달바 · 긴나라 · 가루라 · 마후라가를 말합니다. 불탑에는 이 팔부신중을 각 면에다가 하나씩 새긴 것이 많답니다.
동 승탑에는 상륜부 쪽에 지붕처럼 새긴 게 정말 멋스럽습니다. 서까래와 기왓골까지 꼼꼼하게 새겼어요. 게다가 꼭대기에는 새가 날개를 활짝 편 모습도 있네요. 무척 정교하고 아름답네요. 새는 봉황이라고 하더군요.
맨 아래는 구름과 용 모양, 그 위에는 사자상, 또 그 위엔 팔부신중, 그 위엔 사천왕상
꼭대기에는 봉황 네 마리가 사방을 보며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답니다. 참 멋지네요.
아까 말한 기와지붕 처마를 나타낸 걸 좀 보세요. 어찌나 정교하고 꼼꼼하게 잘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시절에 이렇게 돌을 정교하게 다루고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고 새긴 걸 보면 정말 놀랍지 않나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국보로 지정된 이 동 승탑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부도탑이 도선국사(827∼898)의 탑이라고 하나 이를 입증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하네요.
동승탑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건 바로 동승탑비입니다.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보물 제153호)
아하, 여기도 아까 저 아래에 현각 선사 탑비에서 본 것과 비슷한 모양이네요. 여기도 이 탑의 내역들을 적은 탑신이 사라졌습니다.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螭首)만 남아 있답니다.
안타깝게도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임진왜란 때 없어졌다고 하고요. 나머지는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머릿돌인 이수(螭首)는 구름 문양을 한 듯하네요. 아까 현각 선사 탑비에는 구름 문양과 용이 한데 뒤엉킨 것처럼 보였는데 여기는 구름 문양만 보이는 듯합니다.
그리고 또 남다른 게 있는데요.
받침돌 등은 거북이로 된 건 똑같은데 거북이 등에 날개가 달렸네요. 하하! 마치 거북이가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힘차게 날 듯합니다. 재밌네요.
귀부인 받침돌의 머리는 역시 용의 머리이군요. 아까 현각선사탑비 것보다는 조금 작은 듯하군요. 거북이 어깨 쪽에는 날개가 솟아 나온 모습이 두드러지게 보이네요. 안타깝게도 이 용의 머리도 훼손된 것을 복구해서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워낙 많은 수난을 겪었던 구례 연곡사, 어쩌면 손상이 전혀 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입니다. 앞서 보았던 국보인 동 승탑은 정말 온전한 채로 잘 보존된 것이지요.
아, 그리고 머릿돌 가장 꼭대기에는 불꽃무늬를 장식한 연꽃 봉오리를 표현했네요.
국보인 동 승탑과 동 승탑비가 이렇게 대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연곡사에는 국보가 하나 더 있답니다. 바로 <구례 연곡사 북 승탑>이랍니다. 국보 제54호입니다. 지금 막 둘러본 동 승탑과 아주 비슷한 모양이라고 합니다. 여기도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 산 위로 또 올라가야 한다네요. 벌써 오후 5시가 다 되어갑니다. 구미까지 갈 길은 멀고 해는 일찍 떨어지니 아쉽지만 이건 포기했습니다.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도 해가 일찍 떨어지겠지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얼른 내려왔어요. 비록 또 다른 국보인 북 승탑을 마저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것들을 새긴 하루였습니다. 그 어느 예술작품 보다도 더 아름답게 만든 연곡사 국보와 보물들, 그야말로 연곡사는 보물창고였습니다.
들어올 때와 똑같이 사천왕문을 지나 다시 일주문을 빠져나가면서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다봅니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동족끼리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며 싸워야 했던 수많은 목숨들의 붉은 피, 또 대를 이어 절의를 지키며 살다가 순국하신 의병 대장 고광순 선생의 순국지에서 느낀 가슴 벅차고 뜨거웠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가을철 붉은 단풍이 더없이 고운 때에 찾아가면 더욱 좋을 구례 연곡사, 꼭 그렇지 않아도 아무 때고 찾아가도 좋은 곳, 두 번에 걸쳐 소개한 아름다운 풍경도 참 예쁜 절집이지만 가슴에 새기고 배울 게 참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구례 연곡사에 간다면 제가 느낀 이 뜨거운 마음을 함께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https://youtu.be/8Q6IbYquh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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